고종의 명암, 과연 그는 비운의 군주였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얼마나 진실일까? 얼마나 정확할까?
우리는 기록으로 남겨진 문서를 가지고 내력을 살펴서 추적하여 재구성하고 평가한다.
최근 사료를 통해 알려지는 역사적 진실이 들어났다. 대한제국을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은 이완용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장본인은 고종은 조선후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高宗, 1852.9.8 ~ 1919. 1.21 / 재위 : 1897. 10. 12 ~ 1907. 7. 19)이다.
조선말기《순조 · 헌종 · 철종》 3대에 걸쳐 세도 정치를 펼치던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默契: 말 없는 가운데 서로 뜻이 통하는 것. 또는, 그렇게 하여 성립된 약속. 묵약(默約)이라고도 함.)에 의해서였다.
조선말기 대한제국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
1.러일 전쟁 / 1904년 2월 8일 / 일본군의 인천 · 마산 · 원산 상륙, 서울 · 덕수궁 점령
1905년 일본승리, • 포츠머스 조약은 1905년 9월에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의 중재로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강화조약이다.
2.한일의정서/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 내 일본군 주둔
한일의정서는 1904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이다.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3.제1차 한일 협약/ 1904년 8월 22일/ 고문정치
4.대한제국군 감축/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화폐정리사업
5.1905년 ~ 1909년/ 조선후기 상업자본 몰락
화폐경제 붕괴, 일본 화폐에 예속
6.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 통감정치
7.고종 양위 사건/1907년 7월 24일/ 고종 강제 퇴위와 순종 즉위
8.정미7조약(제3차 한일 협약)/1907년 7월 24일
차관정치
제3차 한일협약 또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 7조약은 1907년[1]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9.대한제국군 해산/1907년 8월 1일 시위대 ·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 정미의병 발발
10.기유각서/1909년 7월 12일/ 일본 제국에 사법권 · 교도행정권 위탁
11.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9월 1일/ 전체 의병 소탕, 항일의병 만주 대이동
12.한일약정각서 1910년 6월 24일/ 일본 제국에 경찰권 위탁
13.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 전략,
일제강점기 탄생
수 많은 관련 기록과 증거는 너무 명약관화하다.
이미 100년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표한다.
1907년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었던 바로 그 이상설이다.
“이 조약은 맺어도 망하고 거부해도 망한다.
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어찌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죽으려 들지 않는가 (准亦亡不准亦亡也 如等亡焉則 無寧決志殉社· 준역망부준역망야 여등망언즉 무녕결지순사).”
(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0/10/21/JQHMFQKTAJB7LFMXUUSJKRYCZ4/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일본서 뇌물 2만원(25억원)을 받았다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일본서 뇌물 2만원25억원을 받았다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 받은 황제
www.chosun.com
한마디로, 조약 체결 1주일 전에 황제 고종이 일본 공사로부터 2만원(20~25억)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분은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이고, 이유는 ‘내탕금 궁핍 상태’였다.
조약 상대방의 궁박함을 이용한 증뢰(贈賂)요, 태조고황제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나라를 판, 명백한 수뢰(受賂)다.
https://youtu.be/0ggdgm-md2I?si=MsKwaNVEBArPDCq7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종, 민비의 遊宴과 매관매직의 발단은 元子가 태어난 이후 궁중의 祈禳(기양 :복은 들어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비는 일)은 절도가 없어 그 행사가 팔도의 명산까지 미치고, 고종도 마음대로 游宴을 즐겨 賞을 줄 경비가 모자랐다.
兩殿이 하루에 천금을 소모하여 內需司에 있는 물량으로는 지탱할 수 없으므로 호조와 선혜청의 공금을 공공연히 가져다 썼으나 재정을 관장하는 사람이 감히 거절을 할 수 없어, 1년도 안되어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다 동이 났다(재정파탄). 이로부터 賣官賣科(매관매료)의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됐다는 소식이 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숨어 술을 마시며 통쾌해했다. 반면 순종은 친히 통감부에 행차해 이토의 죽음을 슬퍼하고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줬으며 장례비로 3만원(4억원), 유족 위로비로 10만원(13억원)을 지급했다.
고종 역시 국권 침탈의 최대 원인 제공자라는 책임을 벗기는 힘들다.
https://m.mk.co.kr/news/columnists/8729280
조선의 26대 왕이자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를 ‘아버지와 아내의 그늘에서 우왕좌왕하다 나라를 잃고 만 무능한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만들어야만 했던 일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고종의 첩보원들
미스터 션샤인이 일깨운 '비운의 군주' 고종
https://v.daum.net/v/20181006140332592?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