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4.3 사건의 배경과 이해
1945. 8.15 그날
대한민국은 길고 긴 일제에 의한 무단통치 압제에서 벗어나는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주둔하던 일본군과 일본인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일은 미군이 주도하에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미국을 공격했던 주범인 일본을 응징하고 항복시켜 승전국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어 우리말(한글말살)과 이름까지(성씨개명) 빼앗겼다.
또한 해방의 그 날 이후 대한민국은 미군정하에 통치되고 있었다. 1848.7.17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국으로 1948.8.15《대한민국》이 탄생하기까지는 꼭 3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이 때까지 우리나라 반도에는 정치인들이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1946년 5월경 국내 정치세력은 미군정의 분류 기준에 따르면 네 계파가 있었다.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
김규식·원세훈 등의 중도 우파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좌파세력,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하는 극좌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서는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관망 내지 부정적 입장에 서 있었다.
김구와 임정세력은 반탁을 강조하면서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이승만 또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익 진영의 박헌영도 여운형에게 미국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등 부정적 입장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좌우합작 운동에 우호적이지도 않았고, 어느 계파도 정국을 주도할 만한 단체는 없었다.
1946년 말 10월 항쟁의 여파 속에 좌익 3당 합당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동력은 급속히 소진되기 시작했다.
이같이 혼한한 정국 가운데 1947년 들어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7월의 여운형 암살 등을 거치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고,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간파 세력은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함으로써 그 명맥을 잇고자 했다.
1945~1948년 3년의 제주도 역사
광복과 해방으로 자유를 되찾은 우리나라는 미군정에 의해 통치기간을 거쳐 대한민국 건국되기까지 진통과 사회적 혼란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https://jeju43peace.or.kr/kor/sub01_01_03.do
제주4·3| 제주4‧3의 역사| 주요사건|
주요사건 광복 직후 제주도의 정세 1945년 8월 한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
jeju43peace.or.kr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이는《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을 소탕하기 위한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무고히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536p)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개정 2022. 1. 11.>
1. “제주 4• 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2. “희생자”란 제주 4 • 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인(受刑人)으로서 제5조 제2항 제2호에 따라 제주 4 • 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을 말한다.
https://m.lawtimes.net/5083(법률신문)
[뉴스와논단] 북한매체가 바라본 제주 4.3
최근 제주 4.3기념회에 참석여부를 두고 여야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이념적 입장에서 첨예한 갈등이 있다. 이재명은 국민의 힘을 학살의 후예자로 보았고 한동훈 대표는 정
m.lawtimes.net

1998년 한 인터뷰에서 김 前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밝혀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두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4.3 사건의 실체는 남로당(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둘째, 그 당시 그 일로 억울하게 죽으신 분들이 많았고, 그 시건에 대하여 진실을 밝혀 누명을 밝혀 줘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하나만 기억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악행에 관한 이야기는 4.3에서 사라지고, 오직 이승만 정권의 공권력에 의해 발포된 총에 맞아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4. 3사건의 처음 이름은 '공산폭동'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 법적, 사회적으로 매우 엄격한 반공체제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의 제기나 재해석 등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그래서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위로 및 보상 등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제13대 대통령선거 제주유세 때 김대중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다. 나도 용공조작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 - 1987년 11월 30일
어떠한 왜곡이나 편집 없이 당시 김 前 대통령은 정확하게 제주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부터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지난 13일 전당대회 첫 합동연설회에서 "제주 4.3이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일어났다"라고 밝혔다.
이는 이미 위에서 북한매체들이 밝혀온 대로 민간인들 학살이면에는 선동을 주도한 남로당, 빨치산, 북한군이 있었다. 북한매체가 이를 증명해 준다.
1948년 4월 3일 봉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사건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 = 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 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무장대는 4월 3일 행동을 개시하면서 2개의 ‘호소문’을 뿌렸다. 하나는 무장대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여순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 일대의 남로당 당원과 합세하여 여수, 순천 지역을 점거하고 일으킨 반란과, 반란의 진압과정 속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에 의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민간인들 학살이면에는 선동을 주도한 남로당, 빨치산, 북한군이 있었다.
북한매체가 이를 증명해 준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좌익사상을 가진 정권이나 사람들이 북한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무기고 탈취, 차량탈취 등 순식간에 무기고 털린 것은 미간인들의 소행이라고 보기 어려워 북한군이 내부에 침투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5.18 '광주사태'도 마찬가지이다.
선우윤호 기자 yuno93@pennmike.com
문재인 대통령은 "진압 과정의 반인권적 행위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막으려는 남로당의 반란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남로당이 주도했다 해도 진압 과정의 반인권적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발발 동기와 진압 과정은 분리해야 한다."고 했다.(분리수거가 안됨)
우리는 역사를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평가한다.
해방을 맞이한 미군정은 제주도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7만명을 잏본으로 돌려 보내고, 해방읗 맞아 일본에 거주하던 제주인 7만여명이 일본에서 돌아왔으니 제주도는 얼마나 혼란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거리적으로도 멀고 공권력이 가장 미치지 않는 곳이 제주도였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사회는 두 부류로 갈리고 혼돈은 가중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막으려는 반국가 세력인 남로당의 반란으로 4.3 사건이 촉발되고 점점 사건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지금에라도 억울한 죽음으로 가족을 잃은 분들의 아픔을 국가적으로 달래주고 위로하며 기억해주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에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기념도 가능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를 파괴하려던 세력이 그 배후에 있었고, 그들에 의해 선동되거나 그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까지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국가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루어야 할 희생은 그만큼 크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는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