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과 나(1)
먼저 구원은 100%이다. 구원을 핑의와 성화로 구분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은 믿음 100%, 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새사람되는 성화도 100% 그리스도의 공로에 있다. 이는 200%가 아니다.
바울의 신학에는 칭의와 성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설명한 것을 후대에 이를 나누면서 문제가 생기고 부작용이 발생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나뉠 수 없는 한분이시다.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표현한 것이다.
• 삼위 = 세 분, 일체 = 동일한 권능, 영광, 본질이 영원히 같으시다. 이것은 유리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다. 천국에 가서도 그 신비를 노래할 것이다.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알게 되고 경험할 것이다.
나의 구원에는 삼위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는다. 각각 구분할 수 있으나 떼어 놓을 수는 없다.
3층 건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건물은 하나의 건물이다. 1층 없는 2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2층 없는 3층도 없다. 층을 나눌 수는 있어도 3층이 나는 이사가겠다고 3층을 떼어서 가져갈 수는 없다. 1층, 2층도 각각 가져가겠다고 할 수 없다.
처음부터 모든 기초와 골조가 한건물로 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1층(믿음으로 칭의), 2층(거룩한 삶의 성화), 3층(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화)이다.
[ * 어찌 존귀하신 주님의 본체의 영광과 그가 주시는 영광스런구원을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는 전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니 오해없기 바란다.]
성령의 사역
먼저 정의하면 구원을 정의하면 《칭의와 성화》의 모든 과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공재와 동역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고난 받으심으로 얻게 되는 모든 효력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그의 서신에만 (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계시는 신비가 실현되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생과 칭의, 그리고 양자됨과 성화와 성령 충만 등 구원의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실현된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임하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다.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성령은 연합의 영으로 성령 ‘안에’(in)서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 연합을 이루어 상호내주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엡 2:6).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소속은 하늘에 속한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2. 칭의와 성화
'신자가《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의 논쟁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뜨거운 감자였다. ▪︎ '카톨릭 = 모른다/불가하다
▪︎ 개혁주의 = 알 수 있다/구원확신'
로마 가톨릭은 칭의를 ‘의롭다고 선언하다’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혼동한다.
그러나 실상은 칭의(justification, Rechtfertigung)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성취하신 율법의 완성 곧 완전한 의를 이루심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죄인)를 "의롭다" 선언하시는(made or declared to be righteous)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다.
▪︎ 칭의는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것이다.
▪︎ 성화는 믿음의 열매인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없이 칭의는 남용되 위험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루터는 칭의가 우리의 거룩함(성화)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안할 수 밖에 없고 보았다. 실제로 그렇다.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우리의 성화는 매우 유변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카톨릭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평안과 확신보다는 오히려 죄의식과 불안과 두려움만이 더 고조되는 쓰라린 체험을 하였다. 그는 그런 고뇌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이 아니라 오직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루터는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칭의에 대한 이해만이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한다.'고 했다.
이와같이 루터의 신학은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화를 등한히 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온전한 성화 교리를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된다고 믿게 만든다. 그들에게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교묘히 회피할 수 있는 편리한 논리로 남용된다. 이러한 논리애 빠진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복음>을 가르쳐 개신교 안에 심각한 윤리적 방종과 타락을 조장해 왔다.
이러한 부작용을 간파했던 칼빈은 성화를 칭의보다 앞에 두었다. 이는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화를 열등한 것으로 보았던 루터와 다르다.
3.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하나의 구원을 시간적으로 구분하면서 칭의와 성화로 나뉘는데,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일 신자가 구리스도를 믿을 때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그에게 성화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씨없는 복숭아를 보앗는가? 씨와 동시에 열매가 맺힌다. 먹을 때는 구분되어도 열매맺는 과정은 하나이다. 칭의와 성화는 동시에 일어난다. 칭의만큼 열매도 커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하려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칼빈의 논리에 따르면 《성화 없이 칭의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와 하나님이 보시는 성화의 무게는 다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