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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박정희 대통령

언제나 일등 2025. 5. 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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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교육 헌장은 왜 제정했는가?
왜 필요했는가?
비록393자의 헌장내용이지만, 100년댜계의 포부가 담겨 있다.

1968년 12월 5일에 반포된 대한민국 교육 이념을 담은 헌장.
이 헌장에는 대한민국의 좈힙의 근간이 담겨있었다.
"민족 중흥의 발전" 곧 백년대계가 서려 있다.
"우리 모두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것"을 명시했다.

국민교육의 목표·목적·가치·철학·이념이 통째로 사라진 결과
작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인간을, 《무엇을》 위해 길러낼 것인지 그 방향과 목표를 잃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빈사상태가 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이 군사 독재시절에 탄생했다고, 그 내용이 독재인가?
철학자 박종홍 등 당대의 석학 60여 명이 문안 작성 참여하였고, 총 393자로 구성된 국민교육헌장을 박 대통령의 목소리를 통해 국민에게 발표된 것이다.

우리에게 "홍익인간"이란 이념이 있었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는 인간의 육성이란 뜻의 이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장 근본적인 내용이 없었다.
마치 사상누각과 같은 슬로건에 불과했다. 홍익인간이라 했을 때 그 홍익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라는 교육의 핵심 목표가 빠져 있었다.

당시 국민을 계몽하고, 국가를 발전시킬 새로운 《교육 아젠다》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싱크 탱크 역할을 하고 있던 학자·언론인들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가 통치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기 위해 스터디그룹을 운영했다.
대표적인 공부 모임이 화요회·목요회였다.
《화요회》는 대학교수들의 모임으로서 서울 종로구 당주동 사무실에서 매주 화요일 열렸고,
《목요회》는 중견 언론인들과의 모임으로, 매주 목요일 반도 호텔 815호실에서 열렸다.

《화요회》는 최문한(서울대 총장),
정재각(고려대 대학원장),
민병태(서울대 문리대학장),
박희범(서울대 상대학장),
구범모(서울대), 박관숙(연세대), 강병규(중앙대), 오주환(고려대) 등이 주요 참여자였고,
《목요회》는 남재희(조선일보), 임방현(한국일보), 임홍빈(한국일보), 이명영(경향신문), 주영관(서울신문), 송건호(동아일보), 양흥모(중앙일보) 등이 주요 멤버였다.

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이들과 토론했고,
모임에 참석한 비서관들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올렸다.
박 대통령은 스터디그룹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연구회의 건의 사항을 정책에 반영했다.
참석자들이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성과 거둔 사례는 경제건설, 벼의 신품종 개량, 국민교육헌장 제정 등이다.


이후로 이런 대통령이 있었는가?
다른 나라에 없는 새로운 창조의 길을 열어갔던 대한민국, 박정희 댜통령의 안목은 100년을 바라 본 정치가요, 혁명가였다.

근대화에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한 새로운 국민교육헌장 제정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은 박 대통령은 1968년 6월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게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 정립과 시민 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총망라하여 교육 장전을 제정하라”라고 지시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주동적 역할을 했던 철학자 박종홍 교수.

이 지시에 의해 문교부는 헌장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 26명, 심의위원 48명을 선정, 대학교수 20명을 초청하여, 3회에 걸친 초안 작성준비회를 열었다.
이러한 준비 끝에 1968년 7월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제1차 심의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박종홍·이인기·유형진 등이 초안 작성을 맡았으며, 대통령 주관 전체 회의 4회, 국무총리 주관 소위원회 4회 등 총력전 끝에 393자의 헌장이 완성되었다.
정부는 1968년 11월 정기국회에 국민교육헌장의 채택을 상정했고, 국회 본회의는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선포함으로써 현실화 되었다.

한국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 총통은 “우리가 먼저 그런 것을 제정했어야 하는데,
한국에게 기선을 빼앗겼다”라면서 부러워했다.
장 총통은 자유중국 주재 한국대사 김신(김구 주석 아들)에게 관련 자료 수집을 부탁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서독에서도 독일 청년의 정신적 교량 역할을 하는 헌장 제정에 고심하고 있던 차에 한국에서 국민교육헌장 선포 소식 듣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국민 교육 헌장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 우리들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국민 교육 헌장은 1994년 문민 정부 출범 이후 교육계의 반발과 함께 《군사독재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아 교과서에서 삭제되고,
기념 행사도 폐지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선포 기념일마저 없어지면서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습니다.

1. 군사독재의 잔재라고?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정부 시절 제정되어 학생들에게 강요되었으며, 일제의 '교육칙어'와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문민 정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과 함께 폐지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2. 전체주의적 성격?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주의를 강조하고, 개인의 다양성과 자유를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교육 과정에서 일괄적인 교육을 강조하고, 학생들에게 특정 가치관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3. 과도한 암기 강요?
국민교육헌장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교과서에 실리고 학생들에게 암기하도록 강요되었는데, 이는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었습니다.

4. 일제 교육 칙어와 유사?
국민교육헌장은 내용이 일제 시대의 교육칙어와 유사하여, 일본의 군국주의적 교육 이념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송기숙 교수. 그는 1978년 6월 국민교육헌장이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면서 이를 반대하고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가 탄압 당했다.
29109년에는 곽민지의 ‘국민교육헌장의 정치사적 의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인하대 박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동원한 지 식인들은 교육칙어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일제의 황국신민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칙어와 친화성을 갖는 것에 대해 비판적 입장 취하기 어려웠다”라고 주장했다.

곽민지는 문제의 논문에서 국민교육헌장을 관통하는 박정희의 핵심 사상을 대아소아(大我小我)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큰 나(大我)이자,
나는 곧 작은 국가(小我)라고 보는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사상은 일본의 국체(國體) 사상에 뿌리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곽민지는 “유신체제는 적어도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던 때부터 예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기술하여 마치 국민교육헌장이 유신체제의 기둥이자 뿌리인 것처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했다면 당대의 싱크탱크였던 석학들은 꼭둑각시였나?
이를 뛰어넘는 헌장을 내놓아야 하지 않는가?
대안없는 비판은 허공 속에 떠도는 메아리일 뿐이다.

일제의 교육칙어와는 완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북한의 공산주의에 맞서고 나라를 지켜 내야하는 절박함을 가진 시대였기에.
다소 군사독재같은 부분이 비춰질 지라도.

왜냐하면 국민교육헌장의 핵심 내용은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건설에 참여하고”라고 되어 있다.
이제 환갑이 된 나도 이를 암기하며 이런 나라가 되길 간절히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