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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침몰

나라를 지키지 못한 비극,  '외교 및 동맹의 기본원칙'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의 멸망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을 꼽는다면

고종과 왕비 민비의 외교 실패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난세를 돌파할 능력이 없으면 줄이라도 잘 서야 생존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지도자의 무능은 국가를 무너뜨리는 주범이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당사자는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라고 자칭하던 고종이다.

황제면 뭘하나? 지도력이 없었다.  

그는 특히 정상적인 외교 절차를 무시하고 고종에게 조약체결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항하지도 못하고

그는 몸이 아프다는 걸 핑계 삼아 뒤로 숨고,

내각대신들이 끝내 반대하자 마침내 이토가 고종과 담판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며

마침내 '조약체결'의 어명을 내리지 않았던가

 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과 체결한 조약으로 늑약이라 불린다.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에서

‘을사늑약 (乙巳勒約, 굴레 륵) ’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조약.

그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한다' 였다.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일컫는 말이다.

이 조약이 원천무효이지만, 나라를 지킬 힘없는 자의 허공에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한국 내의 모든 외국공관이 철수했으며, 해외의 한국 공관 역시 모두 철수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제사회라는 무대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조약체결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을사늑약은 사실상 일본 식민지가 되었던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 11. 17~1895. 10. 8)

 1 평가가 엇갈리는 명성황후 · 타고난 정치가인가? 망국의 주역인가.

    - 국가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 헐값에 팔아버린 국모, 국가재정 파탄 주모자

 2 '민비(閔妃)'라고 불린 이유 · 

 3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 · 

 4 흥선대원군과의 운명적 대결 · 

 5 죽어서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다.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책봉황후이다.

국왕인 고종에 비해서 외교관들의 만남이 많았던 왕후이다. 

시부는 흥선대원군 고종의 아버지이며 며느리는 명성황후 민비를 칭한다.

두 사람의 정쟁에는 고종을 빼놓을 수 없다. 고종은 명성황후와 일심동체이다.

그러니 정쟁은 아버지와 아들의 정쟁일 수도 있다.

즉 '권력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만고의 진리가 구한말 역사 속에서 실증된다.

문제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모두가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대의 영걸들이 합쳐서 융합하지 못하고 반목했다는 것이다.

서로를 성장시키며 건강한 경쟁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역사를 만들어갔으니 나라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라 말아먹은 기생충 '민비' vs 격변의 시대에 나라를 위해 외세에 맞서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은  조선의 상징 '명성황후' 

고종이 직접 쓴 '명성황후 행록'에

"내가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특히 외국과 교섭하는 문제에서 먼 나라를 끌어들여 가까운 나라를 견제하길 권하니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감복했다.

황후가 일찍이 나에게 말한 것들이 지나고 보면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황후의 통달한 지식과 멀리 내다보는 안목,

앞날에 대한 헤아림은 고금에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훌륭한 공덕으로 나를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돌볼 수가 있었다."

 외척 민씨 일가들의 전횡이 촉발되고, 무속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는 등

실정에 의한 부정적 측면도 나타나 비난도 감수해야 했으나

명민한 판단력과 총명한 지혜로 조선의 생존을 도모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일본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명성황후가 일본의 조선 침탈을 저지하는 버팀목 역할을 확실히 했기 때문에 제거하기로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1895년 10월28일 일본인 자객에 의해 사망한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부른다.

 

부정적 시각

그러나 한말 3대 문장가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민비)의 모럴해저드, 민씨 척족의 국정농단을 이보다 세세히 묘사한 저술도 없다. 

 황현은 "영리하며 권모술수가 풍부해 정사에 간여한 지 20년 만에 나라를 망쳤다"고 개탄했다.

유력자 사이에서 매관매직이 일상화됐지만 고종까지 직접 나서 벼슬을 팔아먹었다.

밀양 사람 박병인은 왕에게 35만냥을 내고 경주군수 자리를 받았다.

돈독이 오른 왕이 수령을 빈번히 교체했다.

수령은 임기가 너무 짧아 바친 돈을 채 거둬들이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기생충을 허용한 자는 고종이었다. 

 

서서히 침몰해 가는 조선, 무능한’ 고종, ‘국정 농단’ 명성황후는 오해인가? 사실인가?

 어떻게 한 나라의 국왕이 국가의 안위는 내팽개쳐 놓고

자기만 살겠다고 여기 저기로 숨을 궁리만 하는가?

일관파천, 미관파천, 아관파천, 영관파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이듬해 2월 20일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애초의 파천 자체는 친위쿠데타의 성격을 가진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당연한 결과였는데,

일각에서 영향력 증대 정도가 아니라 일거에 지배권 확립을 노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로 인해 민비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친위쿠데타라면 친일 정부 전복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인데,

고종은 왜 1년 넘는 긴 기간 동안 공사관에 머물렀을까?

고종에게도 러시아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빌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측이 고종의 신변 확보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종의 작은 이익과 러시아의 큰 이익이 합쳐져 파천 상태가 길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공사 안련이 가고 모간이 대신 왔다. 안련은 우리나라에 머문 지 수십 년 되었는데,

돌아갈 때 사람들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내 일찍이 구만 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000년에 한국 황제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가 1895년 주일 영국 공사 어니스트 샤토우와의 대담에서 

'조선의 독립은 현실성이 없고, 조선은 주변의 가장 강력한 국가에 병합하든가 보호 아래 두어야 한다'고

말 한 것에서 제국의 지도자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보여준다. 

 

(노주석의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 131~149쪽 "베베르 수기 전문"에서 발췌).
민 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 하에 마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새벽 7시 30분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여자 복장으로 변장하고

고종과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오는 데 성공했다. (…)

친일파 세 사람은 타살당하였다.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였다.

이때 러시아 공사관 경비 해군은 100명이었으나 서울 주둔 일본 수비대는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새로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자 서울 남쪽에 있는 일본인 조계지로 이동한 분노에 찬 군중이

일본인의 목제 가옥을 파괴하지 않을까 염려해 방어를 하였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하였던 한국 근대 국가이다.

 "중국과의 관계가 책봉, 조공 관계였잖습니까.

중국이나 일본과 다 동격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뜻에서 대한제국을 출범시켜서..."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갑오개혁으로 조선 왕조 체제가 해체된 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새롭게 황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황제국가)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나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힘없는 군주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국제적 요인은 일본의 청일전쟁·러일전쟁 연승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낸 뒤, 여세를 몰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후 대한제국의 도시개혁 꿈을 좌절되고 말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고종의 마지막 카드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그 자신도 강제 퇴위됩니다.

이어서 순종을 마지막으로 조선 500년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긍정적 시각

 

구한말 역사는 ‘망국’, ‘비극’의 무대라 굳이 쓰고 싶지 않은 이유 

그동안 명성황후에 관한 왜곡된 이야기 중 하나가 여흥 민씨의 척족을 대거 기용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건 고종의 어머니 역시 여흥 민씨였다는 점이다.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에 나서면서 자신을 보좌할 신하가 필요해 여흥 민씨를 기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중 명성황후와 정말 가깝다고 할만한 인물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고종과 더 가까운 사이였다.

 

-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어떤 존재였나.

민비는 고종의 든든한 정치적 동지로,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국정을 함께 이끌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북경에서 외국 서적을 대거 사들여와 이를 섭렵했다.

그 때문에 구중궁궐 안에서도 열강들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파격적으로 차별받던 중인과 서얼, 무관, 상인을 가까이해 개화를 앞당기기 위한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명성황후의 명민함과 외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을미사변 1년 전인 1894년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왕궁 안에 연금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한 것이다.

다행히 서구열강을 두려워했던 일본이 서양인의 출입은 막지 않았는데,

그때부터 명성황후는 선교사와 외교관 부인 등 서양 여성을 향원정으로 초대해 일본의 침략 사실을 알렸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세계를 향해 호소하면서 러시아가 고전하고 있듯이,

명성황후는 전략적으로 조선의 위기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오웬 데니는 고종을 이렇게 평가했다. 

"매우 용감하고 현명하며,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데니는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라, 청국의 하수인 처지였다.

그럼에도 고종을 그같이 평가했고 결국 이홍장에 의해 해고됐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선 부국강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개항을 적극 추진했다.

갑신정변 직후 ‘개화’에 치를 떠는 분위기에서도 척사파 신하들의 반대와 조롱을 무릅쓰고 개화에 박차를 가했다.

(소설가 손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