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깝게도 항일투쟁 혹은 독립운동이 순수했던 분들이 계셨다. 정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이끼며 자신들의 목숨을 다 바치신 분들이 계신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써야만 한다.
때로는 좌파나 우파에 의해 어떤 이는 미화되고, 어떤 이는 매도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교과서에 《독립운동가》로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그들은 나라의 독립보다 나라의 독립과 함께 곧바로 공산주의 정권의 나라를 세우려고 독립운동을 했던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떠들었다. 재중국 ...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야」한다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다."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시정부 내 보수세력인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들었다'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김원봉이 항일투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했던 독립운동이 결국엔 공산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증명했고, 북한의 침략전쟁을 도와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데 참여했다.
김원봉은 전쟁 전에도 인민공화당계 반대한민국 빨치산을 양성했다. 김원봉은 북한 내각으로서 6.25 전쟁 중 김일성을 찬양하였다. 6.25 전쟁 중인 1953년 3월 21일 로동신문에 '김일성장군의 교시를 지침으로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자'라는 글을 썼다.
김원봉은 북한 초대 내각 국가검열상으로 1952년까지 지내고 곧바로 로동상(노동부 장관)으로서 전시 핵심 관료를 지냈다. 남침에 주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본인이 사임한 적도 없다. 그가 맡았던 책무는 남파간첩 파견, 노동력의 전시 동원, 무기 생산 등 전쟁과 적화통일에 앞장섰고, 북한 권력 핵심으로 중요 요직에 있었다.
이러한 자들에 의해 순수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노력이 훼손되었다.
1.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그들은 누구였을까?
즉, 해외항일운동을 위해 중국·만주·일본·미국 그리고 소련으로 이주하여 그 나라들에 귀화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그들.
특히 소련으로 갔던 독립운동 지도자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사망하였거나 귀화하였다. 그들 중에 대한독립운동에 공헌한 것은 적지 않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랑의 바탕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꿈꿨을까? 아니면 북한을 꿈꿨을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스탈린정권이 소련에 망명한 한국 독립투사들을 이용하여 그가 원하는 적화운동(赤化運動)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미루어 놓았던 것일까?
나라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
스탈린 곧 소련의 실책일까?
그들을 활용하지 않은 것이 스탈린의 실책일까? 전혀 아니다. 이미 스탈린은 그러한 샹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유럽에 집준해야만 했기에 덜 신경을 썼던 것이고 동부 유럽이 정리된 후에 하려고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스탈린도 코가 석자였다. 그의 발등의 불이 더 급했다. 모스크바가 유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사할린에 있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초창기 대한제국이 망하고, 소련 동부애 위치한 연해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활동하던 시기는 아직 러시아혁명 전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다.
구한말에는 많은 독립투사와 의병들이 당시 러시아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레닌에 의해 소련이 형성되던 시기에 많은 한인독립투사들이 시베리아와 연해주지방에서 활동했다.
공산주의 운동 코민테른 태동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약칭 코민테른(Comintern) 또는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은 1919년 3월 소련 공산당의 혁명가들이 설립하게 된다.
한 마디로 공산당 운동을 전개할 통일적인 《국제 조직》이다.
레닌의 주도하에 1917년 2월 혁명에 이은 10월 혁명, 혹은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 혁명의 두 번째 단계다. 10월 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며, 《볼셰비키들(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인솔한 급진적 공산주의 분파이자 유라시아 북부 지역의 공산주의 정당_ 당시 약 30만 명 (1917년))》이 이루었으며, 카를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볼셰비키》는 폭력에 의한 혁명, 중앙집권적 조직 통제, 노동계급 지도에서 소수 직업혁명가의 역량 확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적 경제주의 및 기계주의 해석 타파,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등을 주장
코민테른 조직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짜르 정부를 무너뜨린다. 이 조직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1943년 5월에 코민포름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면 코민테른의 목표는 무엇인가?
1919년 3월 2일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의 수출을 시도하였다. 레닌이 정립한 공산주의 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장 군대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사용하여 국가 왼전한 소멸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도적 단계로 이행함으로써, 전세계 자산계급의 전복 및 세계적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을 위하여"가 그들이 투쟁하는 목표였다.
겉으로는 혁명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인 국가를 전복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공산사회주의 건설이 최종목표였다.
조선독립군은 아직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이 무르익기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하였는데, 이들이 러시아혁명에 크게 기여한 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자유시사건(自由市事件) 같은 참사도 일어나게 되었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사건은 1921년 6월 28일 극동 공화국(현재의 러시아 아무르주) 내 스보보드니(러시아어로 "자유로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러시아 적군의 통수권 접수를 거부한 한인 망명 독립군들이 포위 진압된 사건이다.
러시아 자유시에서 우리나라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공산당)이 교전한 사건이다. 흑하사변이라고도 한다.
당시 러시아 차르 정권이 무너지고 레인의 공산주의 정권이 뿌리내리지 못한 혼란하던 시기로 당시 관동지역을 지배하던 일본군은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공산당) 정부는 협상을 통해 일본군을 철수시키려 했다. 하지만, 도리어 일본군은 소련 영내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로서는 소련 군대가 아직 일본군에 대항할 수 없었다.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한 소련은 일본군과 마찰을 피하고자 한인무장단체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은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을 따르고 있었고, 이를 받아들일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불응하자 소련군은 무장을 해제하고자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사망자 272명 등 6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들이 기억할 것은 레닌은 과격한 혁명을 먼저 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리고, 전세계 공산화를 위한 국제적인 조직으로 《코민테른(Comintern)》을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국내 공산화 운동의 태동
레닌은 코민테른(Comintern)을 이용하여 동쪽의 중국·일본·한국·기타 아시아 각국에 공산당을 세우려 했다. 당시 독립군들은 이르쿠츠크(Irkutsk) 계열의 소련주재 한인공산당(韓人共產黨)들의 후원을 통해 서울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레닌은 1922년 제1차 극동노력자대회(極東勞力者大會)를 통해 이주한 혁명투사들을 포섭을 시도하였는데, 이 때 포섭된 이동휘(李東輝)·박진순(朴鎭淳)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을 펼치고, 국내 서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토의했다.
이같이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이미 1925년부터 1928년까지 3년간 조선공산당(朝鮮共產黨)이 활동했다. 지만, 일본경찰의 감시와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교육을 받은 민족주의자도 김규식(金奎植)도 한때는 소련의 원조를 받아 한국의 독립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4년 1월21일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소련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소련의 전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레닌은 소련에서 공산혁명을 성공한 후 코민테른을 이용하여 세계각국의 농민 특히 민중들인 무산자(無產者)들이 소련과 같은 공산혁명을 각각 이룩하도록 격려하였다.
스탈린의 전략과 계략
스탈린은 내부에서 정권을 장악하면서 세계 무산자의 조국은 소련이다. 세계 공산혁명보다 먼저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책을 바꾸었다.
스탈린에게 있어 코민테른은 소련정부의 일개 외교정책기관에 불과했다.
그의 바람은 세계공산혁명도 소련공산당의 지도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의 정책에 맞추어 소련에 있는 각국의 공산지도자들은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각기 자국의 공산혁명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의 지령하에서 성취하도록 하였다.
스탈린은 유럽에서의 공산혁명을 보다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며, 아시아에서 특히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공산혁명을 완수하는 데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중국의 공산혁명은 소련의 잘못된 지령에도 붙구하고 모택동(毛澤東)이 성공시킨 반면, 한국의 공산혁명은 소련에서 오는 그릇된 지령도 많았고 또 일본경찰의 끝없는 탄압하에 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북한공산정권은 한국의 인민과 무산자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후 소련 군대가 세워놓고 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스탈린정권이 시행한 한인정책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루기로 한다.
첫째로, 독립군 상황 제2차 세계대전이전의 재소한인들의 소련에서의 혁명운동과 소련의 거주상황을 분석하고 둘째로 해방후 소련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북한에 들어와 공산정권 수립 하였으며 스탈린 사후에 그들이 북한에서 어떠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간략하게 논하려고 한다.
스탈린정권과 한국 공산혁명 운동
러시아에서 독립사상을 품고 있던 이동휘(李東輝)는 1918년 5월 볼셰비키당 간부인 <크라스토체코프, 김알렉산드리아>과 협의해 원조를 확약받는다. 이동휘는 드디어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톡 북쪽)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이동휘는 곧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조선에서 3.1운동이 있은 후 1919년 4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선임된다. 같은 해 11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그의 일파들은 상해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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