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선언"은 1848년 마르크스(Marx,K.)와
함께 와 엥겔스(Engels,F.)에 집필되고 세상에 발표되었다.
작은 소책자로 발표된 공산당 선언은 당시로사는 매우 급진적이며 과격한 새로운 사상이었다.
공산주의 선언의 테제는 "이제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갈등, 대립, 투쟁, 쟁취, 거기에 평등을 위하여를 더한다.
그 배경이 되는 사건과 사상은 무엇이 있는가?
프랑스 혁명하면 대부분 루이 16세가 처형을 당한 1789년의 혁명을 가리킨다.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의 시초"이며 세계사적 으로 볼 때 말그대로 대혁명이었다.
역성혁명(군주의 성이 바뀜)이 아니다.
혁명은 사회전반을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을 말한다. 혁명(革命, revolution)은 한 마디로 가죽을 바꿔 놓는 것이다. 기존의 전통, 사상, 권력이나 조직 구조의 갑작스럽게 바꾸는 변화를 의미한다.
혁명 革命[가죽 혁, 목숨 명]
첫번째 글자의 본래 의미로는 혁(革)은 가죽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탈바꿈하다" 등의 뜻이 있다. 그래서 개혁(改革)과 변혁(變革), 혁명 등으로 쓰인다.
그리고 다음의 명(命)은 무엇을 뜻할까? 목숨이 달린 것으로 하늘의 뜻, 곧 운명을 의미한다. 운명의 운(運)은 옮길 운으로 이동시켜 놓는 것이다. 命(명)은 명령 받았다, 혹은 타고난 것을 말한다. 사람은 성격 즉 天性(천성) 또는 자질을 타고난다. 변하지 않는 타고난 것을 옮겨놓는 것이다. 혁명에는 반드시 나름대로의 명분이나 하늘의 뜻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극에서는 '운이 다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유럽사회는 왕정이 무너지고, 혼돈의 시기를 거치며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다.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먼저 봉건주의가 해체시켰고, 산업혁명(1760년~ 1820년 사이)으로 인해 경제적인 변화는 사회의 커다란 변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유럽의 격동기에 이러한 사회현상을 지켜보며 꿰뚫고 있던 마르크스 - 엥겔스는 새로운 벙치사상을 주장했으니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당 선언에 나타난 과제의 주요항목으로는
토지의 국유화, 강도 높은 누진세, 상속권 폐지,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몰수, 국가자본에 의한 국립은행 설립, 운수기관의 국유화,농촌과 도시의 대립 제거, 아동공장노동 폐지 등이다.
단순히 '사유재산의 철폐'가 아니라, '모두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공산당선언은 노동운동의 사상과 이론적 지침이 되었고, 서부유럽에 전파되면서 러시아 출신의 독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레닌(Lenin,N.)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체계를 잡게 된다.
레닌은 1917년 10월 과격한 공산당인 볼셰비키(Bolsheviki)의 혁명으로 왕정인 짜르정부를 무너뜨린다.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인 ‘코민테른(Comintern)’이 창설하는데, 코민테른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으로서 국제 공산주의운동으로 그가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 해외공산주의운동
초기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의 발원지는 러시아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두만강을 넘어 극동노령(極東露領)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이고, 경술국치 후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3·1운동을 계기로 정치운동가들의 이주가 많아졌다. 1926년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관구집행위원회(管區執行委員會) 발표에 의하면, 관구 내 거주하는 한인 수가 18만5480명에 이르고 있다.
이 무렵 독립사상을 품고 있던 이동휘(李東輝)는 1918년 5월 볼셰비키당 간부인 크라스토체코프, 김알렉산드리아과 협의해 원조를 확약받고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이동휘는 곧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고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1919년 4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됨(11월 취임)으로써 그의 일파들은 상해로 옮겨갔다. .
이동휘는 1920년 말 모스크바 자금이 도착하자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1921년 1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했고 5월 한인사회당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파에 대항하여 박진순(朴鎭淳) · 김립(金立) 등과 같이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을 조직하였다. 중앙간부로서는 이동휘 · 김립 · 조완구(趙琓九) · 조동우(趙東祐) · 이동녕(李東寧) · 김두봉(金枓奉) 등이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여운형(呂運亨)은 당으로부터 문서번역을 책임지게 되어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여 간도지방과 기타 지역에 배포하였다.
한편, 중앙시베리아지역인 이르쿠츠크 한인들은 1918년 1월 22일에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를 창립하기 위하여 회합을 가졌다.
그 뒤, 1920년 1월에 남만춘(南萬春) · 김철훈(金哲勳) · 최동순(崔東順) 등이 중심이 되어 이르쿠츠크공산당 코르뷰로[고려국(高麗局), 이칭: 고려부(高麗部)]를 조직였다. 이르쿠츠크파라고 지칭하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파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들 이르쿠츠크파는 7월 '전로고려공산당(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을 업고 1921년 5월 6일 이르쿠츠크에서 제1차 재로선인공산주의대회(第一次在露鮮人共産主義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안병찬(安秉讚) · 한명서(韓明瑞) · 남만춘 · 한규선(韓奎善) · 이재복(李載馥)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이재복과 안병찬은 북경(北京)에 근거를 두고 중국에서 활동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들 두 파간에는 심한 의견대립이 있었고, 양파의 제휴 · 합동이 실패하게 되자,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를 비롯한 모든 조직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대신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총국(極東總局)에 속하게 되는 코르뷰로를 설치하였다. 이 코르뷰로는 보이딘스키 · 가타야마센(片山潛) · 정재달(鄭在達) · 한명서 · 이동휘 등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 국내공산주의운동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바뀌어짐에 따라, 언론 · 출판 · 결사 등에 대한 통제가 다소 완화되어 『동아일보』 · 『조선일보』가 창립되고,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일본자본의 침투로 공장노동자가 증가되어 청년단체 · 노동단체들이 조직될 수 있었다.
① 1919.12.:서울에서 차금봉(車今奉) · 박중화(朴重華) · 김사용(金思容) 등 50여 명이 조선노농연구회 발기준비위원회를 조직, ② 1920. 4.:위 명칭은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총회로 개칭하여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③ 1920.6.15.:인천에서 인천노동연맹을 조직, ④ 1920.6.:안확(安廓) · 장기욱(張基郁) · 이병조(李秉祚) 등이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期成會)를 조직, ⑤ 1920.12.1.:정식으로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113개 청년단체, 3만 명), ⑥ 1921.1.27.:청년연합회 간사인 장덕수(張德秀) · 김명식(金明植) · 오상근(吳祥根) 등 민족주의자들이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조선청년회연합회내의 좌파인 김사국(金思國)을 중심으로 김한(金翰) · 박일병(朴一秉) · 이영(李英) · 박형병(朴衡秉) · 임봉순(任鳳淳) 등이 서울청년회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청년연합회는 2개 조류로 분열이 되었고, 연합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덕수 등은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운동이 쇠퇴하는 반면, 김사국 · 이영 등 서울청년회파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하고,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적 제반결의를 하게 됨으로써 사회주의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밖에 1921년 11월 일본에서 박열(朴烈) · 김찬(金燦) · 정재달 등이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는데, 이에 가입한 김약수(金若水)는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1922년 12월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이 입경하여 활동하게 되자 서울의 급진적 청년들은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그리고 2월 신인동지회(新人同志會)를 조직하였다. 북성회계는 1923년 5월 토요회(土曜會)를 조직, 계속해서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와 제휴하는 등 자기들의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서울청년회계와 북성회계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 서울청년회계가 요리점 낙양관(洛陽館)에서 북성회일파에 대하여 폭행을 가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산주의사상은 주로 지식인을 통해서 수용되었고, 각종 운동단체 내에 침투되고 여러 개의 사상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 경 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총국의 코르뷰로(이동휘 · 정재달 · 한명서 등 3명의 한인위원)는 이르쿠츠크 군정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 있던 김재봉(金在鳳)과 신철(辛鐵, 본명 辛容琪)에게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할 지령을 내려 파견하였다. 즉, 김재봉은 공산당을, 그리고 신철은 공청(共靑)을 조직할 임무를 주었다.
그리하여 신철은 1923년 4월에, 김재봉은 5월에 서울에 들어왔고, 주로 북성회계와 접촉을 가졌다. 그리고 1923년 5~6월 김찬의 집에서 이봉수(李鳳洙) · 김약수 · 원우관(元友觀) · 신백우(申伯雨) 등과 코르뷰로 국내부(이칭: 내지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7월 김재봉 · 김찬 · 구연흠(具然欽) · 홍덕유(洪悳裕) · 홍증식(洪璔植) · 홍명희(洪命熹) · 박일병(朴一秉) · 원우관 · 이재성(李載成) 등이 모여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고 북성회와 함께 노농총연맹을 조직하려고 계획하였다.
한편, 서울청년회에서는 1923년 3월 신흥청년회 및 기타 청년단체를 망라하여 전 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개최하였고, 북성회계의 노농총동맹조직계획에 대응하여 같은 해 10월 노농대회 준비를 시도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중지되었고 북성회계의 계획도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찬 · 김재봉 등은 신사상연구회를 만들었고,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하였으며, 3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라노농동맹, 그리고 대구에서 남선노농동맹을 조직하였다.
4월 신사상연구회와 북성회가 주도하여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직하게 된다. 이에 맞서 서울청년회측에서는 1924년 4월 21일 조선청년총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여기에는 신사상연구회계의 신흥청년동맹원들이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형식상으로는 노농단체 · 청년단체가 양파의 통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으나, 주도권 장악을 위한 투쟁은 치열하였다.
1924년 4월 현재 조선노농총동맹에 가입한 단체는 182개였으며, 조선청년총동맹에는 224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어 서울청년회계가 다소 우세한 편이었다.
1924년 7월 11일에 개최된 조선청년동맹 제1차 집행위원간담회를 계기로 서울계와 화요회계는 다같이 당조직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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