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과 후유증
1-1. 한국의 독립 과정
- 우리 민족은 여러 갈래의 작은 민족이 합쳐져 이 지역에 정착하고 몇천 년을 살아온 후, 중국의 위협으로 인해 19세기 중엽에 개항기를 맞이함
- 19세기 중엽부터 근대화를 시작하던 일본에 먹힘
-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국권을 잃고 38선을 중심으로 독립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에 처함
- 대한민국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냉전의 전선이 됨
-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진전이 없어짐에 따라 관계 악화로 이어짐
1-2. 분단과 후유증
-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 정부가 소련의 사주 밑에서 작동하던 시점, 남쪽에서도 분단된 것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음
- 이승만 박사는 UN의 지지를 받아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좌익 세력의 반발로 인해 좌절되었음
- 한국의 독립은 UN의 공인을 받았지만, 안으로 밖으로 적을 품고 태어난 것이 됨
- 대한민국은 독립 초기 자유 민주주의를 기강으로 하는 국가 수립 과정에서 체제 전복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6.25 전쟁으로 이어짐
-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침략과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일어난 변화에 주목해야 함
1-3. 군사독재와 그 이후
- 한국의 독립은 UN의 공인을 받은 합법적인 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님
- 한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였음
- 그러나 6.25 전쟁을 통해 국가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좌익 세력의 개입이 컸음
- (중요) 군사독재 기간 동안, 한국의 국가체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이후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한국의 위치를 이해해야 함
- 최근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변화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음
2. 한국전쟁 개요
2-1. 한국전쟁 발발 배경
- 한국전쟁, 6.25 전쟁과 연결됨
- 미국, 전쟁 발발 초기 UN에 신고하지 않으려 함
- 당시 미국,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신고하지 않으려 했으나 한국과 인적 동맹 맺음
- 한국전쟁, 초기에는 6.25 전쟁, 후에는 국제전으로 변모함
- 전쟁 발발과 함께 공산주의자에 대한 경고도 동시에 나옴
2-2. 한국전쟁의 전개
- (중요) 한국전쟁 초기, 2학년 학생들 휴학하고 서울 수성국민학교로 가서 군대에 동원됨
- 이승만 박사, 공산주의자들과 타협 불가함을 인지함
- 미국과 한국전쟁, 이해관계 충돌로 갈등이 심화됨
- 이승만 박사, 국내 정치에 휘말리자 UN군이 투입됨
- UN군은 원군을 보내기 전에 한국에 도착함
2-3. 한국전쟁의 종식
- 한국전쟁, 3개월간 지속되다 인천 상륙으로 끝남
- 한국전쟁 종식 후, 이승만 박사는 국내로 돌아감
- 2학년이었던 이승만 박사, 6.25 전쟁 때 학년이 높은 학생들을 데려가 인재로 삼으려 함
- 아버지, 아들 이승만 박사의 정치 세력 유지를 위해 북한으로 이주시킴
- 한국전쟁 종식 후 이승만 박사, 아버지 이순신 대장과 함께 체류하며 고뇌함
3. 한국 전쟁의 이해
3-1. 한국 전쟁 발발의 배경
- 한국 전쟁 발발의 주체는 스탈린과 김일성
- 스탈린은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한반도를 공산화 시키고자 함
- 1949년 중국 공산군이 중국 본토를 통합하며 미국의 방위 영역을 한반도에서 비껴가게 됨
- (중요) 스탈린은 전쟁에서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한국을 통합하기로 결정함
- 모택동은 스탈린의 편의를 받아들이고, 스탈린이 모택동을 우호적으로 보도록 함
3-2. 전쟁의 발발과 전개
- 스탈린은 모택동과의 접촉을 통해 스탈린에게 미끼로 이용하려 함
- 스탈린은 모택동이 적어도 우호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조작함
- 스탈린과 모택동이 두 번 접촉하며 한반도에서 침공을 시도함
-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 같아 한국이 고립된 듯한 상황이 형성됨
- 한국 전쟁은 침공과 회복을 반복하며, 휴전 협정이 성사됨
3-3. 전쟁 종식과 후폭풍
- 1950년 10월부터 중공군이 인해 작전으로 한국을 침투함
- 흥남 철수 사건 등 전쟁 상황이 전개되며 한국 군대는 혼란에 빠짐
- 1.4 후퇴를 거치며 서해안쪽에 집중된 휴대군과 동해안쪽에 UN군이 몰림
- 휴전 협정 이후 종전 논의가 활발해짐
- 이승만 박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학 능통의 소회를 보냄
4. 한반도 통일의 역사
4-1. 스탈린의 지령과 공산당의 힘
- 스탈린의 명령으로 공산당이 통일과 협력하게 됨
- 공산당은 스탈린 체제하의 1인 독재체제였으나 국제적으로 작용하여 김일성에게 명령을 내림
-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공산당 조직을 통해 지시하는 지령을 내림
- 스탈린은 소련 안에서도 공산당을 검토하여 승인함
- (중요) 스탈린의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과 공산당에 내보내는 문서들을 주의 깊게 다룸
4-2. 이승만의 대외 정책
- 이승만은 통일을 위한 분단 상황을 피하고자 함
- 편지에서 38선은 국제 규약으로 인정되며, 한반도 통일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힘
- 마카오 장군도 이승만의 정책을 지지함
- 이승만은 스탈린의 설득을 이끌어 내고, 휴전 협상에서 승리함
- (중요) 휴전 협상 이후, 미국은 반공포로 문제를 야기함
4-3. 반공포로 문제와 휴전
- 반공포로 문제는 한반도 통일을 어렵게 만듦
- 38선 유역에서 공산화가 진행되어 젊은이들을 북한군 포로로 삼음
-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수용소에 갇힌 젊은이들을 고민하며 반공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함
- 미국은 조약을 맺으면 강대국의 자유가 제한되어 하지 않으려 함
- 이승만은 미국과의 방위 동맹을 제안하며, 휴전을 하지 않고 협상에 돌입함
5. 한국전쟁과 이후
5-1. 한국전쟁 발발과 그 여파
- 거제도 소환 포로를 모르게 석방함 -> 미국이 방위조약을 수락하게 됨
- 한국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미국에 많은 요구를 함
-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한국의 개항 때 선린우호조약을 하여 한국을 지켜주기로 약속함
- UN 승인을 받은 후, 한국은 북한이 이를 어겼다고 판단함
- 전후 한국은 미국의 초빙을 받아 의회에서 연설함
5-2. 전쟁 후 한국의 변화
- 한국은 전쟁 후 복구가 잘 되어 물질적으로 빨라졌으나, 후유증은 남음
- 남북한 인구 전체의 4분의 1 이상이 이산가족이 되고, 6.25 초창기에 자발적으로 의용된 사람들도 있었음
- (중요)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념에 따라 칼부림을 하는 사례가 있었음
- 한국전쟁 후,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반공 세력이 되어 그들과 살았음
- 공산당에 와서 정 완장을 침
5-3. 한국전쟁의 피해와 통일의 어려움
- 한국전쟁은 남북한을 구분할 수 없이 우리 민족 전체의 죄 없이 죄인이 된 수단이었음
- 한국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기치를 갖고 발전해 온 나라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적으로 토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음
- 4.3사건을 일으킨 김달삼 등은 한국전쟁 후 반대 측으로 나와 내란을 일으킴
- 한국전쟁 후, 반대 측에서 내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진압하지 않고 나라를 세울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음
- 제주도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일군데서만 진행함 -> 6.25 전쟁부터 한국전쟁까지 지리산 등으로 위협을 받음
6. 대한민국의 탄생
6-1. 대한민국의 탄생과 이승만 정부의 역할
- 개방 사회로서의 성격을 가진 대한민국은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꿈꿨음
- 이승만 정부는 52년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개혁을 시도했으나, 소위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개헌을 무시함
- 밖에서 수립을 반대하고 계속해서 무너뜨리려는 세력으로 대한민국이 태어났음
- 대한민국의 탄생은 반역으로 볼 수 없으며, 항거 투쟁을 통해 죽은 조상들을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야 함
- (중요) 사상의 자유는 허용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안 됨
6-2. 대한민국의 공산주의와 안보 위기
-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을 솟아내야 했으나, 위장 포장술이 발달해 과잉 반응이 잦았음
- 공산주의자 가족은 공산당과 연루된 사람을 배제 대상으로 삼음
- 연좌제에 빠진 사람들은 6.25 이후 이산 가족이 되어 불안정한 상태가 됨
- 공산주의자 가족은 이성적으로 압박을 가하지 않고 가족 내 통제를 유지함
- 30년 후 이산 가족 찾기 활동이 이루어지며, 이성적으로 분리된 가족이 각자 수준에 맞게 평화로운 분리를 이룸
6-3. 후유증과 한계
- 후유증으로 인해 가족들은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 살아감
- 6.25 이후 철저한 탐색과 지적 영역까지 침범하지만, 지식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인식이 만연해짐
- 깊은 차원의 피해는 대한민국의 아버지인 김좌진의 연락과 가족들의 추억 부재임
- 항상 죄책감을 갖고 산다는 것은 가장 깊은 차원의 피해임
- 가족들은 아버지의 사정을 모른 척하며, 죄책감을 가짐
7. 이승만 정부의 기틀
7-1. 전쟁 후 사회 변화
- (중요) 전쟁 중 큰아들 데리고 돌아와 재혼 및 남편 잃은 여자들도 돌아옴
- 3년에서 10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재혼하는 사람들 생김
- 이승만 정부의 큰 후유증인 6.25 전쟁의 여파를 다스리기 위해 법치 국가를 만듦
- 법적으로 명확한 증거가 있으면 무죄로 간주함
- 6.25 전쟁 중에는 다른 정치인들을 강력하게 협박하고 설득함
7-2. 이승만 정부의 성과
- 이승만 정부는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를 택했지만, 공직자 선발은 민주주의 경험이 있음
- 13년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따지는 것이 중요함
- 전쟁 중에도 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등 대한민국을 수호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듦
- 민주주의 체제를 허물어뜨리지 않음
- 이승만 박사가 퇴직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을 원했지만, 자유당의 설득으로 못 이룸
7-3. 이승만 정부의 불행
- 이승만 박사의 대통령 시절, 편안한 노후를 살고 싶어 마음을 바꿨음
- 이승만 박사가 퇴직하고 물러나기를 원했지만, 꼼수를 쓴 것이 불행으로 이어짐
- 공직은 가장 공익을 크게 창출하는 사람을 발탁하는 과정임
- 이승만 정부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함
-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속임수를 썼을 정도로 민주주의를 운영함
8.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경력과 4.19사태
8-1.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경력과 후계자 문제
-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을 중요시함
- 대통령 선거에서 표 1, 2가 중요한 의미가 없었으며,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과가 결정됨
- (중요) 후계자 문제로 불안정성이 존재하였으며, 후계자 없는 정치는 기업이나 창업가의 고생과 비슷함
- 이승만 대통령의 부통령은 대통령 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이기는 경쟁에서 승리하였음
8-2. 4.19사태의 발발과 이승만 대통령의 위치
- 4.19사태가 발발하면서 대통령은 부정선거 부정부패 다도로 명명됨
- (중요) 대통령은 국민을 상대로 계엄령을 발표하였으나, 이에 대한 국민적인 반응은 차츰 약화되었음
-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과도하게 해석하여 사퇴를 고려하였으나, 부인의 개입으로 무산됨
8-3. 4.19사태 이후의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
-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물러나려 했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더욱 어려워짐
- (중요) 대통령 물러날 때 국민들 사이에서는 두 갈림이 있었으나, 국민 전체로 하여금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림
-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했으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강력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
- 4.19사태 이후 대통령 물러날 때 국민들 사이에서는 '더 버티다가는 젊은 애들이 당하겠다'는 분위기 형성
9. 4.19 사건과 이승만
9-1. 4.19 의거의 본질
- 이승만 대통령 부상 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이기봉 일가는 가족과 자살함
- 이 대통령은 물러날 이유가 없었으나, 정부를 해산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음
- 4.19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과 자유 민주주의가 부정되고, 대한민국의 역사에 잘못된 해석이 있었음
- 이 대통령이 물러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부정부패와 선거 부패를 막기 위함이었음
- (중요) 4.19 사건은 의거가 아니라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움직임이었음
9-2. 4.19의 정의와 해석
- '4.19'라는 용어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라는 뜻이 됨
- 4.19 의거는 의로운 행동으로, 부정부패와 선거 부패를 막기 위함이었음
- 4.19 사건을 '혁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임
-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혁명은 대한민국 건국을 의미함
- 건국은 주권자와 이념을 바꾼 것으로, 국민의 헌법 정신에 맞는 나라를 만드는 것임
9-3. 이승만 대통령 하야의 의미
- 이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소수 의견을 무시하여 내쫓음
- 4.19 학생운동은 부정부패와 선거 부패를 물리치기 위한 시위였음
- 이승만 대통령 하야는 이상을 훼손하는 부정부패를 막으려는 움직임이었음
- 4.19 사건을 혁명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임
- 4.19 사건은 대한민국을 깨끗하게 하고, 헌법 정신에 맞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미였음
10. 민주주의와 군사정권
10-1. 공직자의 선거 책임과 내각책임설
- 대통령이 최고위직이지만 직접 안 하더라도 전체 책임질 수 있음
- 대통령 선출이 아닌 내각책임제가 되어야 함
-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내각중심제로 개헌을 해야 함
- 4.19의 원흉을 처벌하고 미숙함을 드러내야 함
- (중요) 대통령과 내각 구성원 모두 책임이 있음
10-2. 군사정권의 기반이 된 민주주의
- 공권력은 강제력과 군사력을 뜻하지만, 식민지 지배 시대와 다름
- 우리 나라의 공권력은 식민지 시대와 달리 국가 기구라서 기능이 다름
- 위서부터 정부가 흔들리면 공권력 작동이 안 됨
- 공권력 작동을 위해선 질서를 지키는 사람도 필요함
- 민주당 내부에서도 권력과 권위를 구분해야 함
10-3. 군사정권의 주요 사안과 군인의 부정
- 6.25 전쟁 이후 안정을 위한 송두리째 대책을 내림
- 군인들이 민간인에게 맡기고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기운이 생김
- 군대가 가장 강압적인 조직이며, 서양의 기준에 맞춰 훈련받음
- 군인 정신이 민주화되고 학생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을 잃음
- 선거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제도 중 하나임
11. 박정희 정부 평가
11-1. 4.19 혁명과 박정희 정부
- 비밀투표를 통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선출할 것인지 결정함
- 선거율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출함
- 4.19는 항의가 온 국민의 뜻을 반영한 채택이 있었음
- 부정부패와 선거 부정 등 문제가 촉발되었음
- 국민의 하나로 뭉친 것이 중요했음
11-2. 박정희 정부의 평가
- 박정희 정부가 제대로 된 경제 토대를 만들었지만, 비판적 사심으로 평가받음
- (중요) 박정희 정부가 권력을 잡은 것은 비교적 사심 없이 노력한 결과였음
- 박정희 정부가 1963년 헌법을 제정한 것은 민주당 정부가 귀국하기 위축된 상황이었음
- 헌법 전문에서 제3공화국과 5.19 혁명을 언급하지 않음
- 헌법 전문은 원칙적인 내용만 다루지만, 사건을 얘기하는 것은 아님
11-3. 헌법 전문과 개헌
- 헌법 전문은 지적으로 개선되어야 함
- 4.19 혁명과 5.16 혁명을 인정해야 함
- 제3공화국 헌법 전문에서 48년 대한민국을 언급하지 않음
- 헌법 개정이 있었어야 했지만, 개헌 시도가 무산됨
- 헌법 전문에서 제3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아서 민주당 정부의 귀국을 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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