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철도는 모든 국가의 젓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이 철도를 갖느냐는 그 나라의 산업화의 척도가 되었다. 고속도로와 함께 산업과 물류 운송 수단으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https://m.mk.co.kr/news/culture/10815385
당시 하얼빈은 청나라 영토 안의 도시였지만 러시아 소유의 동청철도가 지나가는 중심지로 러시아가 경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발판으로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여전히 만주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러시아와 충돌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남동부 도시인 치타에서 시작하여, 하이라얼, 치치하얼, 하얼빈, 목단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총연장 1760km의 동청철도 노선을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일본은 포츠머스조약으로 장춘-뤼순간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1906년 700km 남만철도 노선을 관리·운영했다.
케잌을 자른 칼처럼 러시아의 동청철도는 만주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지나가고, 일본의 남만철도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지나갔다. 이 두 개의 철도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변수가 하나 더 등장했다.
미국 역시 만주지역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포츠머스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국의 철도왕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이 남만철도 사업을 미·일 합작 사업으로 할 것을 일본에 제안하고 가쓰라 다로 수상과 예비각서까지 작성했다.
그렇다.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배를 인정한 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바로 그 가쓰라다. 해리먼의 제안은 일본 고무라 외상의 반대로 무산되지만 1909년 ‘가쓰라-태프트밀약’의 윌리엄 태프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태프트 정부는 만주철도 중립화를 주장하며 러시아와 일본 양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만주에서 러시아 재무대신인 코코프체프를 만나 이 지역에서 세력권을 분할하는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다. 철도 문제가 핵심 의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과 러시아 협력의 산물인 장춘-하얼빈간 남부지선을 따라 러시아철도국이 보내준 특별열차를 타고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차 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철도가 전쟁의 중요한 수단이 되면서 전쟁이 총력전의 양상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쟁은 주로 양국의 군대가 대치한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일에 가까웠는데 철도를 통한 수송과 동원이 가능해지면서 국가의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전면전이 됐다.
철도, 중국 신해혁명을 만들다
철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수탈을 위한 ‘빨대’였다. 청일전쟁 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 대륙에 빨대를 서로 꽂으려고 경쟁했다. 철도를 둘러싼 갈등이 결국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됐으니 중국의 역사에도 철도는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철도 열풍이 불면서 청나라 조정은 지방 정부에게 철도 건설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지방정부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방정부 자체적으로 철도회사를 세워 주식을 발행하고 여기에 세금을 추가로 투자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연장선인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만주에서 배타적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