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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황제 노릇하는 시진핑의 역사관과 역사왜곡

막강한 전제군주가 된 시진핑, 구중궁궐 안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인민들에게 마치 자신을 황제로 인정받으려 몸부림친다.
그의 야욕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총체적이다.  
그 가운데 하나, 특히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왜곡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이다.
중국역사교과서를 개정하면서 '대한민국을 중국의 일부였다'는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던 한반도와 관계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역사적 규정할 때 강조하는 용어가 있는데, ‘속국’ ‘종주권’ ‘종번체제’ 등이다. 이는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한마디로 객관적 역사를 주관적으로 ‘각색’하여 배우는 학생들에게 주입하여 왜곡된 역사로 동북공정을 완결하려 한다.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된다. 북학의(박제가)는 조선 후기, 청나라의 문물 · 제도 중 일부를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 개혁을 추구하였던 기술론이다.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자식을 유배로 보내야 했던 조선은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속국은 아니었다.
“종주권"이란 고대 팔레스틴 지방에서 군주와 신하가 맺는 협약이다.  그런데 이런 전근대적인 용어로 과거 역사를 모두 억지 해석하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종주권’ 용어는 황제나 왕이 종주국(suzerain state)에게 제후의 봉신국(vassal state)은 충성 맹세하고, 종주는 봉신의 안위를 책임지는 형식이다.
이같은 용어로 중국 역사를 각색하려 한다. 종주권조약은 이와같이 고대사회와 유럽 열강 제국주의가 사용하던 용어이다. 고대와 열강을 침탈하던 세대에 사용되던 이 용어는 일본어로 번역을 거쳐 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에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중국이 ‘의도적으로’ 왜곡, 변형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외교는 대등관계를 무시하고 복속, 지배라는 프레임에 가두려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중국의 관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와 식민지를 침탈하고 지배하던 시대의 용어들을 통해 종국적으로는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일부였다’는 인식을 심기 위한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역사 만들기
역사적으로 이러한 배경에는 그들이 원하는 "중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만들기"를 위한 방책이다.
이는 중국이 강대국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제국적 프레임으로 이끌고 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학생들이 학습할 때에 그들의 편집, 조작된 사상을 심기 위한 것이다.
이는 시진핑의 국가 전략의 변화, ‘제국의 재구성 과정’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종학 교수도 “부강해진 중국의 동아시아 전략, 이 지역에서 새롭게 패권을 차지하려는 욕망이 과거 역사의 재해석과 맞물려 가고 있다”고 짚었다.

중화제국 건설
19세기 말에도 중국은 이미 한반도에 관해서  새로운 ‘질서’ 만들기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청이 19세기 한중관계에서 ‘천조상국의 편법 외교’를 시도했었다. 그 당시 중화제국은 스스로를 ‘천조’, ‘천조상국’으로 지칭했다.
이는 그들 스스로를 마취하여 자기들이 천하를 통치한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들이 유럽열강과 일제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1880년대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마주하게 된 중국은 이런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중국이 외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부당하고, 자기들이 지배하려던 것을 정당화하려는 획책에 불과하다.

삼전도의 굴욕
1637년 2월 24일(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으로 흔히,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표현된다. 이때부터 청은 내정간섭을 해 왔는데, 1882년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조항을 넣었다.
당시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10년 가까이 총독처럼 조선 조정 위에 군림, 내정간섭과 청의 국익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며 강압적인 무력을 휘둘렀다.
그는 여러 차례 고종 폐위를 시도하였고, 조선이 미국에 파견한 공사가 현지 청 외교관의 지시를 받도록 강요하는 등 조선을 속국으로 계속 묶어두려 했다.
“청은 결국 천조체제의 허상을 지키는 데 집착하다가 청은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조선에 대해서는 끝까지 집착했다는 것이다.
‘중국에게 있어 한반도(대한민국)는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중국이 한반도 곧 대한민국을 특수한 ‘속국’으로 여기며 집착한 데는 중요한 지정학적 이유가 있다.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북경을 점거함으로써 전국을 통일하고 만년동안 동요하지 않는 기업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1644년 8월 20일부터 청나라는 천도하였고, 10월 10일 정식으로 북경을 수도로 하게 된다.
“명·청 시기에 중국 왕조가 남경을 수도로 두지 않고, 북경(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이유는 한반도가 중국 안보와 직결되게 때문이다. 중국은 덩치는 크지만, 한족 스스로가 중국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중국은 언제나 북방민족에게 지배를 받아왔다. 한반도에 적대적인 세력이 들어서면 만주(현재의 동북 3성)가 위협받고 이것은 곧바로 수도 베이징을 위협하면서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이유에는 지리적 요인이 크다. 베이징을 처음 수도로 잡은 나라는 전국시대 연나라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베이징은 농경문화로 들어가는 입구와도 같은 곳이었다. 금과 청을 세운 만주족은 유목민이 아니라 수렵과 농경을 곁들여 살던 부족이긴 했지만, 그들에게도 한족의 본거지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베이징이 수도로 삼기에 제일 좋았다.
중원을 정복했던 왕조들은 한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재빨리 피신하기 위해 퇴로가 필요했는데, 베이징은 여차하면 그들의 고향인 북쪽으로 도망 가기에도 지리적으로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이전에는 난징(남경,南京)이 수도였으나 명나라 영락제가 북평(북경)으로 옮겼다.
그 때부터 베이징을 위협할 수 있는 적대적 세력이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는 것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내전 승리 직후의 피폐한 상황에서도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우리는 중국이 한족이 90%이지만, 늘 이방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중국 역사가 잘 보여 준다.
중국 제국의 역사를 살펴보자. 중국의 가장 많은 민족이 한족인데 그들이 독립운동으로 세운 왕조가 [진·한·남조·수·당·송·명]이다. 나머지는 북쪽의 이민족이 정복하여 세웠단 시대였는데, [북조·요·금·원·청]이 있다. 지금의 중국은 청이 일제에 의해 무너지고, 항일투쟁하면서 공산화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중국은 한족(漢族)만의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한족은 오랜동안 지배받았던 민족으로 대다수를 이룬다.
지금의 중국은 이전의 그들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나라이다.
정복 왕조는 지배 범위에 따라 일부지역을 지배를 했던 북위(北魏), 요(遼),금(金)과 중국 전체를 지배했던 원(元),청(淸)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요(遼)나라(916∼1125)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계통의 종족.
● 금(金)나라(1115∼1234)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서 여진족의 본명은 흑수말갈.
● 원(元)나라는몽골족이 세운 나라로서 어렵게 유목 생활을 해온 민족. 철목진이 몽골 전역을 통일(1170∼1206)하여 징기스칸으로 즉위한 후, 남송을 치고 중국을 통일한 원제국은 중국 역사상 강남을 지배한 최초의 북방민족이 되었다.
●  후금(後金)은 1627년 아직 청나라를 세우기 전, 조선에 침입(정묘호란),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됨.
그러나 그 후에 청나라를 건국한 후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과 말 등의 조공을 요구했다.
● 청(淸)나라(1636~1912) 누루하치가 통합한 후금을 기반으로 만주와 요동 지배를 완성. 만주족만의 국가에서 탈피하여 만·한·몽의 3대 민족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여
1636년에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침.

이리보면 현재의 중국은 다민적 국가이며, 많은 기간 이방민족에 의해 세워지고 지배받던 나라이다.
그들의 역사나 문화 역시 주체성을 찾기 힘들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역사 속에 국가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역사는 흘러간다. 역사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로 기록되고, 그렇게 자기들의 정당성을 위해 역사는 왜곡당한다.
오늘날의 중국 역사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