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왜 동물에 비유할까? 그만큼 인간에게도 동물적 요소가 있다는 말인가? 숙명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존재, 거기에 갇히며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민중'에 속한다.
민중은 과연 ‘저항’하는 ‘주체’인가?
이는 갈등론, 유물론, 사회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보다 안정된 사회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늩 ' 자유시민'을 꿈꾼다.
민중이 저항의 주체라는 관점은 갈등론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사회가 만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지배층의 지배를 위한 논리로 수백년을 길들여졌다. 숙명처럼 여기고,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짐승같은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지배계층은 철저히 그들의 논리와 사상을 집요하게 강요하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권세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가 조선은 지유나 해방은 꿈도 꾸지 못하게 가두었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시키는 대로 사는 짐승으로, 그리고 그들의 사고를 고착화시키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운명이고 숙명처럼
조선이 무너지기 이전까지 신분은 법적으로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4개 신분으로 양인이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유교가 바탕이었던 조선말기에는 고종과 민비는 돈에 눈이 멀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그 당시에 노비는 주권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천인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숙명처럼 여겼다. 사회뱐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죽어라 일해야만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침략
그러나 갑작스러운 일제의 침탈은 조선이라는 사회를 뒤집어 놓는 사회변혁을 가져왔다. 이래 살던 저래 살던 그들에게는 사회변화만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들은 광복과 6.25는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밑바닥에서 살던 그들에게 빛이 들어 온 것이다. 일제 침략으로 사회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어렵기는 해도 새로운 세상임에 틀림없었다. 광복과 함께 토지개혁으로 내 것이라는 땅도 생겼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투표하는 참정권이 생기고, 배우면 신분상승을 가져오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점차로 글장님을 면하고, 낳은 자식들이 도시로 나가 살게 된다. 아직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비럭 전세에 살아도 내 집이니, 종이나 머슴이 아니다. 누구에게 터치받지 않고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가난해도 도시에 살면 농촌의 사람보다는 부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이 바로 민중이다.
기능주의 세계관, 갈등론적 세계관
당신의 어느 시각에서 보는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기능주의 입장과 갈등론적 입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갈등론(공산사회주의적 시각/마르크스)보다 기능론을 택하는 보수경향이 민중에게 심겨져 있다.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진보나 갈등론보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사회를 더 원한다.
사회주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다.
그래서 민중이 진보를 더 기대할 것이라고 선입견이 있지만, 그들은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이를 따라가기도 버겁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사회주의 시각에서는 이것이 역설일 수 밖에 없다. 민중에게 여전히 그들 가운데 인처럼 박힌 것이 있다.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가부장제 사고가 뿌리깊게 박혀있다. 부모나 가족 안에서 은연 중에 성차별을 받는다.
그래도 참는다.
속상해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무시해 버린다.
상처는 있어도 참아낸다.
그리고 직장생활도 자신이 원하는 직장이나 직업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직업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직장에서 갈등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희박하다. 쉽게 떠나지도 못한다. 직장을 떠나 몇 개월도 버틸 수가 없다. 당장 독촉장이 날라 온다. 집밖에 나 안든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먹물 좀 먹으면 사회주의자가 되고, 자칭 고상한 인간이라 자부한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는 왜 더 변혁이 일어나지 않고, 보수로 살아갈까? 이해가 안된다.
그들은 지식이라는 머리에 관을 쓰고 저들을 무능하다고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들을 바라볼 때 '지식인의 이상적 민중상'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서처럼 "시대라는 커다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제도, 사상, 전통.... 등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헷세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을 의미한다.
아브락사스는 결국 "성속" 이원성의 통합을 의미한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즉 성과 속이 하나이며, 시작이 곧 끝이며, 씨앗이 곧 열매이며, 어둠이 곧 빛인 것이다.
이 양극성은 무엇인가?
혼돈 속에 질서, 무지와 지혜,...
인간 존재 자체가 그렇다.
그 때 자기대면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
전쟁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한 싱클레어는 야전병원에서 문득 옆자리에 있는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 언젠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너의 내면에 귀 기울여라"
그리고 그는 사라진다.
(“네가 언제인가 나를 다시 찾아도 예전처럼 가줄 수는 없어. 그때는 너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이 키스는 어머니가 너에게 해주는 키스다.” 하면서 입을 맞추고 떠나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서 사라진다. 이제 싱클레어 스스로가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싱클레어는 이제 그 내면에서 데미안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전해 준 이 한 마디 "너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깨를 딛고 자신을 데미안에게, 그리고 한 단계 성숙해 지고 이전의 싱클레어에서 변화와 성장을 통해 보다 깊은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을 갈등하는 존재, 곧 민중으로 보는 유물론적 세계관과 인간을 자아를 찾아가는 고상한 존재로 보는 세계관이다.
물론, 싱클레어가 역사 속에 민중에 눈을 뜨는 존재로 억지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이분법으로 나누고, 이들의 갈등으로 여기는 이론을 바탕에 두고 있다.
자유/갈등, 성장/분배
무엇에 초점을 두는가?
관점의 차이가 있다.
무엇을 더 중여한 가치로 여기는가?
민주주의는 <자유와 성장>을
공산사회주의는 <갈등과 분배>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시민과 성장을, 사회주의는 분배의 평등을 위한 투쟁하는 민중으로 정의한다.
누가 이 세상을 더 바르게 이끌어 갈까?
경영학에서도 X-Y 이론은 맥그리거가 인간관을 동기부여의 관점에서 분류한 이론이다. 맥그리거는 《전통적 인간관 : X이론》으로, 《새로운 인간관 : Y이론》으로 지칭하였다.
어느 이론이든 장단점이 있다. 그래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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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이유
"민중, 시대와 역사 속에서" 와 "가난하고, 죽어라 일하는 민중이 보수적이라는 역설"이라는 책에 대해 읽기 전 나의 생각을 정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