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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김원봉의 사상과 평가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 사람을 두고도 다른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때로 한 사람에게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인데, 개인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나 개인적인 성향 등으로 인해 어떤 이는 악인으로 묘사되고 비판을 받고, 또 어떤 이는 부풀려지고 선인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역사의 인물들(고종, 흥성대원군, 연산군....)을 보아도 그렇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리한다. 평가 역시도 각자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고, 어느 편에서 바라볼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그래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오해와 진실을 벗겨보자.

특히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위기 상황에서 행한 일은 당시로서는 최선이지만, 훗날의 평가는 달라진다.
어느 기점까지는 의인이거나 악인이더니, 어느 기점부터는 180 돌변하여 다른 사람으로 살 때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처럼 누구에게나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 자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가하는 사람의 잣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 그들이 처한 상황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시대가 흘러 역사는 일순간에 역전되고 바뀌면서 한 인물의 삶도 변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이 우리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역적의 자식이 아닌 이도 없고, 공신의 후손이 아닌 자도 없을 것이다. 누군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선과 악을 행하기 마련이다. 단지 거짓과 악행이 숨겨졌거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입장을 바꾸어 역지서지 해보면 비난할 일도 없을 것이다.
과거에 학폭의 가해자였다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한 사람도 있다. 히자만, 청산하지 않고 회개의 모습을 보아지 않다가 폭로되어 참회하기도 한다.
그래서 평가는 매우 중요하다.

광복군에 관하여
한국독립군 조선의용대에서 출발한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339명~564명/여성28명도 있었음)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였다. 흔히 이들을 약칭해서 '광복군'이라고 부른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제에 의해 1944년 '조선인학도육군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되면서 4,385명의 한국 청년이 강제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남양(南洋)과 중국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1944년 4월 1일 부터 1945년 3월 31일까지의 군무부공작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3월까지의 광복군 병력 수는 총사령부와 그 예하 3개 지대, 그리고 인도전선에 파견된 인원(당시 실제인원 9명)까지 합쳐서 514명에 이르고 있다.
이중 중국군 장교가 65명이니 1945년 말 실제 광복군 인원은
449명인 셈이다.
광복군에는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일본군 한국인 포로, 중국내 한인교민 등이 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그 숫자는 증가되어 갔다.
중국 국민당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던  임시정부는 합의에 따라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에 따라서 모든 작전권은 중국이 가지고 있었다.
1. 광복군은 한반도 본토 진공도 장개석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2. 심지어 압록강을 넘어서도 여전히 국민당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합의가 성립한 것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모든 것을 중국국민당에 의존하는 무기력한 신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약은 1945년 5월에야 완전히 풀렸다.
광복군이 중국군대에서 그나마 자유로왔던 것은 8.15 해방까지 겨우 5개월도 안되는 기간 뿐이었다.
광복군 외에도 광복을 위해 창설된 토교대(土橋隊), 한·중 합동유격대(韓中合洞遊擊隊),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 등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추념사에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는 평가는 옳은 것인가? 이는 국가 지도자로서 어설픈 평가는 아니었을까?
위의 평가에서 문제점은 무엇인가?
1.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친 부풀리기였다. 왜 그런가?
약산(若山),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로 투신하여 3.1 운동 이후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과 함께 단원들은 일제 요인 암살, 국내 경찰서 폭파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이끌었다.
상해 임시정부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원봉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 ··· 근일
소위 조선의용대에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1, 2, 3대 전부가 적국(敵國) 후진을 치러 간다고 중국 정치부를 속이고 전부 팔로군으로 달아났습니다.
팔로군(八路軍) : 항일 전쟁 중 화북(華北)에 있던 중국 공산당 군대로 항일전의 주력부대로 중일 전쟁 후 《인민 해방군》으로 개칭됨.
공산(共産)되기 싫은 대원들은 성명서를 돌리고 광복군으로 돌아왔습니다.
김원봉부터 민족주의자라고 떠들고 중국 당국을 속이다 지금은 엄밀 조사를 당하고 체포, 감금될지도 모르므로 묘계(妙計)를 내어
임시정부와 독립에 무조건 통일한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 내용에는 의정원(議政院)으로 돌아와서 다수로 소수를 합법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상책이요, 만일 임시정부가 거절하면 한족연합회의 결의를 무시하기로 미주 동포에 선전하여 독립금을 임시정부에 납입치 못하게 운동하자는 것이 중책(中策)이며, 그도 안되면 팔로군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독립운동가 민필호는 그를 '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민족혁명당, 임시정부에 참여하려는 의도도 의심했다. 아마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러시아 정부와 선전비와 관련한 교섭을 진행 중이며, 이달 중으로 선전비의 일부를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일본 측에 알려진 전력도 있다.

8.15 해방으로 국내로 돌아온 독립투사들,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하루 빨리 국가가 건설되기를 염원하였는데, 북한은 소련 공산군에 의해 일본군을 해산하고, 남쪽은 미군정에 의해 일본군 해산과 일본인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여 1947년에야 미무리되었다. 해방 후 국가 수립을 위해 지도자들간의 이견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과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진보민족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였던 김원봉은 1948년 4월 월북한다.
그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북 국가부수반 겸 국가수반 권한대행을 역임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보리쌀) 생산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으로부터 로력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54년 1월 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년 10월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이 박탈되었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 독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김일성파를 제외한 당시 북조선 체제 내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계열 인사 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제234군부대 현지지도 중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라는 연설에서 '항일'의 최종 목표에 대하여 규정하며 김원봉 및 기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을 반체제적 인사로 규정하였다.
김일성은 연설하기를  "
의병대라든지, 조선독립군이라든지, 의열단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군대였으며 지주, 자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군대였습니다." 라고 규정했다. 아마도 김원봉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원봉은 1945년 광복까지는 광복을 위해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자진 월북과 간첩단을 진두지휘하며 남파시켰던 인물이다. 이로써 그의 명암을 알 수 있다.어느 공이 큰 가는 각자의 몫이다. 아직도 일제보다 공산당이 더 악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애국지사로 추앙할 것이고, 공산주의에 몸서리치는 천만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부각한다면 민족의 배신자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