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文史哲, 즉 문학·역사·철학)로 보는 불교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알겠는가?
안다고 하는 말과 깨달음과는 다르다.
안다는 것은 밖에서 보는 것이요, 깨달음은 안에서 보는 것이다.
점 더 살펴 보자.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佛陀, 산스크리트어: बुद्ध 붓다)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覺者)을 부르는 말이다. 우주·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변화"에 대한 깨달음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덧없다', 모든 현상은 시시각각 변해간다."
물질세계의 모든 행위나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 또 우주의 만사만물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늘 변화하고 변화하므로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연을 통해서 생기기 때문에 고정되고 변하지않는다.
고로 나라는 존재도 실존하지 않는다.
즉 '제법무아'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오온(五蘊)》은 몸과 네 가지 마음, 육체와 네 가지 정신작용의 무더기라고 선언하고, 아(我 아트만 영혼)는 오온 안에도, 밖에도, 그 중간에도 없다고 선언했다.
불교는 “마음이 무상무아임을 알고 집착없이 행하는 것이 해탈”이라고 본다.
'空'을 알면 불교를 알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유물론이고, 무신론이므로, 지금 현존하는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그런데, 이 인간마저도 영원하지 못하고 멸절한다. 그런데 나머지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이 죽어도 그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고 말한다. 이는 힌두교교리이고, 불교에서 가져 온 교리이다.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말아야 할 육도윤회(六道輪廻)는 불교가 이대로 끝나면, 안되지 않겠는가 무언가 위로가 필요한데,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가져다 사용하다보니 <갑툭튀 : 논리적 비약>가 된 것이다. 불교의 교리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불교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공(空)은 순야타(산스크리트어: शून्यता, Śūnyatā)인데 "비어 있음 · 공허(空虛)"를 의미한다.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공은 “자성(自性)이 없다. 곧 무자성고공(無自性故空).”이다.
공 사상(空 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은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은 연(緣),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났고, 인연에 의하여 변할 뿐이다.
인因은 직접적 원인causes을 의미하고, 연緣은 간접적 조건conditions을 의미한다. 즉, 연기는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들이 상호작용하여 일어나는 것 곧 현상이다.
예를 들어, 씨앗은 나무의 직접적 원인인 인(因)이고, 햇빛 · 공기 · 수분 · 온도 등은 간접적 원인인 연(緣)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씨앗에서 나무가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공(空)보다는 '없음이 아닌' 冇[없을 유]로 번역했다면 참 좋았겠다.
冇[없을 유]는 존재하지만 아짓 수정되지 않아 없음의 상태를 말한다. 곧 있음으로 바뀔 수 있는 상태이다.
쉽게 말하면 아직 '속 알맹이가 없고 겉모습뿐' 이라는 뜻으로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 가는 것을 말한다.
시간은 모든 만물을 지배한다.
그런데, 그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시간 역시도 발생된 존재이고, 또 없어지는 존재이다.
인도에서는 그 시간을 "겁(劫, kalpa)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불교는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안에서 궁극적 실체를 찾아가는 '인식철학(주어진 사물(所與 存在)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공(空)은 어떻게 무(無)와 다른가?
공(空)이란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덧없다', 모든 현상은 시시각각 변해간다."는 말이다. 이는 뒤에서 살펴 볼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로 귀결된다 .
이 말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정확히 모른다가 답이다. 인간의 이성의 한계 넘어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이다.
공(空)과 반야(般若)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실존세계를 탐구하려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 또한 한계가 존재한다. 이것이 현상계에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나’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몸과 심리 현상(육체와 정신을 포함한 모든 것) 등이 실체가 없는 [空한] 흐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공은 물질세계를 반야(般若:깨달음)의 눈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대승불도의 중심이 되는 공사상을 고백하는 것인데, 반야(깨달음)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요지이다. 저 많은 팔만대장경도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바라밀다(Paramita)의 음역으로 '완성'을 뜻한다. ‘저 언덕에(parami) + 이르는(ita)', '피안에 도달한, 또는 지혜를 완성한’ 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모든 것의 지배자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머물지 않으며, 변화시킨다.
영원도 없게 된다.
무제한의 시간만 있을 뿐, 그 시간이 영겁이다.
우리 말 "겁(劫)"은 [kalpa(산스크리트어), kappa(팔리어)]은 겁파(劫波)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지역에서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로서 일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말한다.
"겁"은 일반적으로 태평양 물을 참새 한마리가 한모금씩 물을 입에 물고 다른 곳으로 옮겨두고 와서 이를 반복하여 완전히 옮겨 놓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하니 눈에 보이는 세상의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空은 色과 다르지 않으니, 色이 즉 空이고, 空이 즉 色이라고 점층법과 논리로 이해시키려 한다.
모든 법(法)은 상(相 :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이 없이 空한 것이며, 성별도 없고, 부정하거나 정함도 없고, 증가하거나 감소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이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법이다.”고 암송한다.
반야심경의 세계는 절대 無가 아닌 空이며,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없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없음도 없다는 논리다. 즉 공이란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에 이르기 위해 집착을 버리고 해탈해야 한다.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한다.
한자로 풀이하면 一(한 일) 切(온통 체) 唯(오직 유) 心(마음 심) 造(지을 조)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지어내는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깨달음을 통해 바라보며 그 것을 벗으면, 그 해탈의 세계에 도달하면 행복한가?
그 해탈을 위한 진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로 귀결 된다.
그런데, 그러면 그 세계(모지 사바하)는 존재하는 세계인가? 허상의 세계인가?
그런데 정확한 해석은 그 누구도 모른다.
이런 해석들이 나온다.
“가세 가세 다 함께 피안으로 건너가세, 건너가서 깨달음을 이루어 마치세”
“이르도다 이르도다 피안에 이르도다.
깨달음을 이루어 마치도다”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게 하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정리해 보자.
사리자여, 물질 곧 색은 공(空)과 다르지 않으며, 공(空)이 물질과 다름이 없다.
물질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물질이니, 느낌(감정)과 생각(이성)과 지어감과 의식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空)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하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空)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그러니 지혜의 완성은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영혼>까지도 물질로 보았다. 이는 유물론에 가깝다.
유심론과 유물론은 쉽게 짝을 이룬다.
불교는 유심론(唯心論)이다.
유신론(有神論)이 아니다.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이다.
불교는 철저한 무신론이다.
불교의 결론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으로, 가장 밝은 주문이고, 가장 높은 최고의 주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과 생각을 공의 세계로 몰아간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이런 표현을 쓰면 싫어 하겠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다. "무념무상",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도없이 자신을 "세뇌"하여야 한다. 洗腦(세뇌, Brainwashing)는 '머리[腦]에 들어있던 생각이나 사상 따위를 깨끗이 씻어내고[洗] 새로운 것을 주입시킴'을 이른다.
그래서 마침내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으로, '멍때림'으로 몰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괴로움도 없고, 허망할 것도 없는 공(空)에 이른다. 그러므로 공은 없음(无)이 아니다. 세상에 것에 얽매인 생각을 제거한 상태, 곧 비어있는 공(空)이다.
어찌보면, '없을 유[冇]'를 써야 하지 않을까?
불교에서 무(無)는 사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무(無)가 아니다.
공(空)도 우리들이 아는 비어있음이 아니다. 비어 있음에는 아무런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어있으나 언제든 새 것으로 채울 준비가 되어 있음이다.
우리들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고 하면 망념과 망상이 없는 무심(無心)의 상태가 아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나 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정신은 있으나 정신줄을 놓은 것이 아닌 '멍때림'이다.
깨달음과 동시에 채움이다.
처녀에게는 아직 아이가 있지 않음(無), 그러나 없음이 아니다. 공(空)이다. 단지 당장 없을 뿐이다. 즉, 지금은 없음, 冇[없을 유]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원인을 통해 태에 아기가 들어있음, 유[有]가 된다. 그러므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이나 공(空)이 없음(無)이 아니다.
없음을 포함하고 있는 "冇[없을 유]"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것이 불교가 탄생한 이유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집착하면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불교가 탄생할 당시 당시 현실은 힌두교의 4대교리와 카스트제도가 완전히 인간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아리안족이 가르치는 "범아일체" 사상에 완전히 노예화 되어 있었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면 이 길 밖에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오직 마음에서 만큼은 비움을 통해 안정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순간마다 자신을 현실로부터 자유롭게 만들려 했다.
불교는 "없다"는 무無가 아니다. "공"사상인데, 사실 깨달으면 그 깨달음마저도 없는 세계로 간다.
無我(무아)가 아니라 冇我[없을 유, 나아]이다. 현재 나는 존재(冇)하지만, 번뇌하는 나는 없다(無).
아마도 본래의 주처의 뜻은 그러했으나 산스크리스트어를 번역하던 사람이 冇我[없을 유를 무(無)로 해석하는데 사용하므로 본래 사상이 왜곡되었다고 본다.
즉 위대한 천재가 실수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천재가 한 것을 후대의 모든 사람은 당연히 그런 줄 알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도발인가?
아무리 보아도 해석이 맞지 않아 본래의 의미가 한자로 번역되기 어렵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뜻이 한자로 무(無)에 가깝다 보니 🤔
冇(없을 유)가 본래의 뜻을 드러내고,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 누군가 이 부분을 천착해 주길 바란다. 그러면 완전히 다른 불교적 해석이 되고, 다른 경지가 될 것이다. ▪︎ 천착(穿鑿,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
그래서 의역이라도 해서 위로를 받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 파라가케(바라가제)는 '피안으로 가다',
▪︎바라아제는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혹은 '저 높은 곳으로 가자'라고.
▪︎ '스바하(svaha)'는 '영원하라, 행복하라'로.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없다. 공이기 때문이다.
순야타(산스크리트어: शून्यता, Śūnyatā)는 "비어 있음 · 공허(空虛)"이므로 이것이 마침이다. 공허(텅비어 있음)로 귀결되는 "깨달음"을 얻으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세계로 넘어간다.
가떼 가떼 / 빠라가떼 / 빠라상가떼 / 보디 스와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그 깨달음의 이룸은 "아무것도 없음"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고통이나 슬픔이나 이별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다 허무하고 없음이다.
그러니 이것을 수도없이 독송하면, 어디에 이를까. 생각하는 나는 사라지고 환각에 빠진다.
이것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한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유물론과 무신론 위에 세워진 불교철학의 진수이지만,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어지는 바람과 같다.
그러면 이것이 전부인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 곧 참 나를 발견하는 길은 진정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