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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 자랑스러운 이유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
노벨문학상 수상은 우리나라의 문화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아니 그들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에 우리의 문학 작품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번역의 한계로 인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어려웠었다.
노벨문학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이제 실감하게 될 것이다. 문학에서 선진국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두 번째이다. 대한민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으로 인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뒷말도 있었지만)

역사, 그리고 해석

사람이 살았다고 다 역사가 되지 않는다. 사건이 있었다고 다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그때의 일들, 사건을 기록하여 남겨 놓을 때 그 작은 부스러기 흔적들은 역사의 사료가 된다. 그 작은 부스러기들을 모아 재구성하므로 하나의 역사가 탄생한다.
그런데, 그 역사의 조각들을 왜곡하고 날조하려는 자들에 의해 거짓 역사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역사 이야기들은 얼마만큼 이 진실일까?

역사이해 두 측면, 사실과 해석
역사 서술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 내용이 거짓이라면 전혀 가치가 없는 '날조(捏造 :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다. 사실이지만, 자기 맘대로 빼고 넣고 더했다면 이는 '왜곡(歪曲 : 사실과 다르게 그릇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서술)만큼은 사실이어야 하고, 객관적이고 치우침이 없고 엄격하여야 한다.
그래야 후배와 후손들이 그 역사를 배울 가치가 있고, 역사인식을 갖게 만든다.

역사는 사실, 해석으로
하나는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이고, 또 하나는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historiography)’이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사건의 사실을 그대로 서술한 것으로 객관적 의미를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사건만 나열해 놓았다면, 역사적 가치가 떨어진다. 그 사건들에 담긴 의미를 찾는 해석이 필요하다. 즉, 의미들은 비로소 가치 있는 역사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를 주관적 의미의 역사라고 한다. 어떤 것은 객관적인 역사가 필요하고, 어떤 것은 주관적인 해석의 역사가 필요하다. 사건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그러므로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실 그 자체’인 동시에, ‘(올바른)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어 기록된 사실’로 그 의미를 포함한다.
랑케는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을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 사실만을 기록할 것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영국 역사학자 카(E. H. Carr)는 해석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다.

역사는 승자의 노래인가? 패자 부활을 기다리는가?
대부분의 역사가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쓰여야 진정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조선시대 왕조실록은 당대의 왕이 볼 수 없도록 했다. 만일 왕이 당대에 실록을 읽었다면 실록에 자기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지우고,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도 자기 아버지의 업적을 알고 싶어 했다. 영의정 황희가 이렇게 말합니다.
“불가합니다. 만약 역사 기록을 들쳐보는 모습이 후손들에게 전해지게 되면... 후대의 사람도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워서 당대의 기록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분명 잘못된 일을 옳게 꾸밀 것이고... 단점도 장점으로 교묘하게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런 기록이 남게 되면 그 기록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조실록이 왕의 공과를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정한 역사가 남아 후선들에게 전달되어 훗날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입니다.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사진이나 영상 기록도 남아있고, 취재를 통해 얻은 자료들도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누가 평가하느냐에 따라 어느 것은 넣고, 또는 어느 것은 삭제하고. 또 미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선왕조실록처럼 기록되지 않는다면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하늘과 그 현장에 있던 땅, 산천초목 만이 알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된 역사가 일부분만 강조된다면 그것이 진실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때로는 망원경으로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면 역사 기록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보수와 진보, 그리고 다양한 주장들을 함께 보면서 진실을 찾아가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역사와 소설
마치 역사가 스케치라면,
소설은 그 역사에 컬러로 옷을 입힌 것입니다.
비록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라도 소설 자체가 소설가의 주관적인 옷일 입히는 과정입니다. 컬러옷을 벗기면 역사이고, 옷을 입히면 소설입니다.
이처럼 소설(小說 / novel, fiction)은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또는 어떤 사실에 기반하여 《
창작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다.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을 통해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표현하고 인간 내면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 소설의 특징을 체험과 상상이 빚은 언어 예술로서 ‘진실된 거짓’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을 작가가 미적으로 질서화하여 통일적인 의미가 담기도록 구현해 낸 것으로 산문으로 서술한 서사 문예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쓸 때는 모두가 진실일 수 없으며, 때로 야사(野史)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소설가의 관점에서 주관적 해석이 가미되었다는 것과 전달하려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소설은 산문의 형식으로 된 가공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역사의 아픔을 사실에 입각해서 사료들을 수집하여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쓴 작품을 읽게 될 것입니다.
한강이라는 작가의 시각과 펜을 통해 묘사된 광주에서 있었던 일과 제주에서 일어났던 아픔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의 글을 쓴 김규나 작가는 지난 10일 자신의 SNS에 "(노벨상) 수상작가가 써 갈긴 역사적 트라우마 직시를 담았다는 소설들은 죄다 역사왜곡"이라며 한강 작가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쓴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를 언급했습니다.
왜 김규나 작가는 이번 노벨상 수여에 대해 이토록 강력하게 '노벨 가치 추락, 문학 위선의 증명, 그리고 역사 왜곡의 정당화'라며 폄훼하고 깎아내렸을까요?  
김 작가는 "(한강 작가의 소설들을) 시대의 승자인 것은 분명 하나 역사에 자랑스럽게 남을 수상은 아니다"라고 일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한강 작가의 소설에 대해 "죄다 역사 왜곡"이라고 말하는가?
"'소년이 온다'는 오쉿팔(5.18)이 꽃 같은 중학생 소년과 순수한 광주 시민을 우리나라 군대가 잔혹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이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이 순수한 시민을 우리나라 경찰이 학살했다는 썰을 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을까.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나 SNS 엑스 등에서 활동하는 일부 누리꾼들은 한 작가의 수상을 두고 억압받는 소수자 전형, 한강은 친북 소설가, 폭동을 미화하는 소설가 등의 근거 없는 비판을 하기도 했을까.
이는 각자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책을 접할 때 그 책에는 역사가 있고, 역사 해석이 있고, 역사에 옷을 입힌 소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제주 4.3 사건과 광주 5.18 운동의 사건은 우리 시대의 아픈 손가락처럼, 그 상처와 흔적이 남아있어 두고두고 격렬한 논쟁이 될 것 같습니다.
독자에게 알아서 평가하라고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담론입니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러니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자신들의 시각과 달라도 역사가 기록된 원본은 폐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그 내용이 자신의 바라보는 관점에서 거북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수정하거나 폐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석은 후대의 몫이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정사를 기록한 왕조실록에서 조차도 이순신, 황희, 오성과 한흠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설을 읽으면서 문해력을 가져야 합니다. 문학이라는 매우 섬세한 포장을 통해 역사적 진실이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고, 또는 미화되거나, 혹은 실제보다 축소되거나 부풀려질 가능성이 많이 있다는 것을.

어찌 보면 몇 가지 역사적 진실을 가져와 부분적으로 매우 강렬하게 그 부분만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가의 모든 주장이나 관점이 모두 옳다고 볼 수 없으나,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읽으면 됩니다.
때로는 역사가가 기술할 수 없었던 사건의 현장을 탁월한 작가에 의해 마치 살아서 내 앞에 장면을 보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소설은 소설로 읽어야 하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삼국지를 읽으며 이 모두가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충분히 공감하고 사유와 생각의 폭을 넓히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인간만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어떤 이는 "봐라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덤빌 수도 있다. 그만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무게감있게 쓰여졌으니까.

그러면 한강이라는 노벨상 작가가 바라본 5.18과 4.3 사건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일까?
우리는 객관적 역사와 함께 읽으면서 소설을 통해 어떤 부분은 공감하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못하고 표현되지 못한 것들이 소설을 통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역사의 관심은 그 사건이 왜(why)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단순히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 사건의 발단, 전개, 그리고 그 결말을 따져 보면서 무엇보다 아픈 이에게는 위로와 보상을, 또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반복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그 사건에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국가폭력인가? 무고한 희생인가?
그러므로 소설이 역사적 배경으로 했다면, 객관적인 역사를 함께 읽으면 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분명, 그 드라마가 역사적 배경이나 고증을 통해 만들었지만, 표현되지 못하거나 중요한 사건도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역사를 읽으면서 어느 부분은 창작인지, 아니면 리포트인지, 해석인지 등을 분별하는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독자는 새로운 시각을 얻기도 하고, 소설의 새로운 맛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원본과 번역본
이제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왜곡·생략과 오역은 또 다른 문제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매끈한 번역을 위해 원본의 중요한 문장을 뺄 경우, 정도의 문제겠지만, 이는 맞냐 틀리냐의 문제라기보다 온당한 것이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가 된다. 도덕적 잣대와 미학적 잣대 중 어느 것을 적용할 것이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심각하지 않다면 작품의 원래 맛을 살리는 창작 수준의 번역을 지지한다”고 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10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