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을 살펴보아야 진실도 함께 볼 수 있다.
일제패망 광복해방 1945.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8.15
북한 남침 6.25 전쟁 1950.6.25 – 1953.7.27
제주 4.3 사건 기간 1947.3.1 - 1954.9.21(8년간)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3.1절)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진압과정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8년간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 및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을 소탕하기 위한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들 중 무고히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 공산당 조직 우두머리 김달삼
1947년 제주 4.3 사건의 시작과 그 중심에는 남조선로동당의 선동가이자 반란의 주동자는 누구였을까?
8.15 해방 후 일본에서 유학하고 일본군 소위였던 한 젊고 유능한 청년의 귀국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李承晉)이다. 그는 제주도 대정면 영락리에서 출생, 집안이 부유한 덕에 대구에서 유년을 보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명문가 자식들이 다니던 교토 세이호중학교(聖峰中学校)을 마치고 주오대학 경제과에 입학, 그 후 일본제국 육군 복지산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한다.
일본제국 육군 소위를 거쳐 해방이 되어 입국, 몰래 제주도로 건너가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재직하며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 남로당 제주도당책,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북으로 올라가 남로당 인민 대표자 대회 제주도 대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북한 헌법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조선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를 담당한 김달삼은 부대장(3 군단장)으로 활약하며 제주도민과 우리들의 원흉이 되었다.
위에서 그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매우 천부적 선동능력과 뛰어난 머리를 가진 수재였다. 1946년 12월 경북에서의 대대적인 좌익세력들을 검거하기 시작되자 고향 제주도로 몰래 잠입하여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재직한다. 그는 학생들과 교사, 일본에서 귀환한 제주도민들 대상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친다. 또한《마르크스-레닌주의》소조를 이끌며 좌익세력 규합에 나섰다.
* 소조(小組) : 같은 목적이나 지향 밑에 조직되는 작은 집단이나 조직
대한민국이 탄생도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한반도는 북쪽은 소련이 지원한 김일성이 통치하고, 남쪽은 일본군과 일본인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히키아게샤(引揚者: 건져낸 자 / ひきあげしゃ)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 대만 등에서 거주했다가 귀국한 일본인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들 중의 일부분은 해당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다. 조선에만 70만명이 거주했으니 돌려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제주도는 오히려 일본에 건너갔다가 돌아온 사람만 6만이 넘는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고, 공산당이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다는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미군정이 통치하던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 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3.1절 기념식을 열면서 모여들었다. 3.1절 기념식은 빌미였고, 주최측은 김일성과 연계하며 그들이 유리한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2. 4·3 사건이 진행되는 내내 폭력 즉 무장투쟁이 이어졌던 사실을 부정할 방법은 결단코 없다.
공산주의를 추종하며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던 무장 봉기대(군대) 500여 명(예하 동조하던 4천명)이 빨치산과 연계하여 맹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제주 주민들을 선동하여 남한 정부수립을 극렬히 반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외부와 교류도 적었고, 모든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고, 낮에는 평범한 도민으로 살다가 밤이면 무장봉기대가 내려와 주민들을 그들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죽이는 끔찍한 일이 매일 발생했다.
(빨치산과 연계한) 500여명의 무장봉기대가 제주도 전체를 어지럽히던 가운데, 정부는 급히 전라남도에 있던 군인들을 급파하려 했으나 거기에도 공산당 세력이 무장반란을 일으킨다. 제주도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 학살과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하루 빨리 북한의 공산당(김일성)이 남침하기만을 학수고대하며 항전을 이어갔다. 이것이 6.25(휴전 1953.7.27.10시) 끝나고도 1년2개월간 지속되었다.
제주도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정부토벌군은 강력한 반격을 하면서 이른바 '초토화 작전'(무장봉기대가 머물만한 산간지역을 불태움)을 쓴다. 무장 봉기대와 경찰 경비대 , 토벌대간의 치열한 전투는 매일같이 일어났다.
제주도민의 삶을 생각해 보라.
낮과 밤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평범한 주민들, 그들은 그저 평화로운 나라에 살고 싶은 것이 전부였다.
희생당한 자들, 그들 모두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 가운데 그들과 연락책이 되거나 돕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색출해 낸다는 명분으로 나이가 70이 넘거나 10살 미만의 그 어린 꼬마들까지도 희생당했다.
3. 국가가 해야 할 일과 잘못한 일
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무장봉기대를 진압하고 토벌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국가의 마땅히 해야 할 행위였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오늘의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존재케 한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은 무시되거나 사라지고, 희생자만 강조하며 <오직 국가가 폭력으로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었다>는 주장만 남는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국가적 입장에서 보는 시각과 희생자의 시작에서 보는 관점에 따라 논쟁이 되고 있다.
무장봉기자들과 그들과 합류했던 그들을 토벌하다 죽은 희생자들 그들도 우리 국민이며, 그들을 토벌하면서 무고히 죽었던 제주도민도 희생자이다.
3.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어야 한다.
1947년부터 약 8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수도 없이 출몰하는 무장봉기대의 활동으로 인해 제주도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닌 혼란 그 자체였다. 특히 산간 지역은 계엄령으로 활동이 불가했다. 이처럼 해방 직후부터 일본군 7만명이 떠나고, 6만명이 일본에서 유입되면서 제주도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이 때 흉년이 겹치면서 살기 힘든 상황에 좌익 세력인 남로당은 제주도민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주도했다. 그들 남로당은 1948년 경찰서와 우익 인사에 대한 습격을 수시로 자행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즉, 무장봉기대가 출몰하는 험준한 산간지역 전체를 초토화하는 작전으로 인해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원흉들 무장봉기대가 수도 없이 출몰하며 학살하는 등 피해가 너무 컸다.
제주 4.3 사건은 한 마디로 아직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 혼란한 틈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저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제주도에서 일으킨 무장봉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8년이 넘도록 제주도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북한이 빨리 무력남침으로 공산화를 바라던 무장봉기대였다. 국가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보내어 지난한 전투가운데,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자행되었던 사건이다.
5. 무고한 희생자들, 그 원흉은 누구인가.
낮에는 대한민국 편, 밤에는 반란군 편을 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강요당하던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민간인들은 양쪽에서 고통받고 또 희생됐다.
이렇게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을 기리는 일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500명, 100% 무장봉기대만 색출하여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3만 명의 희생자 가운데는 500명과 연결된 적극 가담자도 있었고, 그들의 가족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아픔을 기억하는 일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당연히 그들을 보듬어 주고, 희생을 함께 가슴 아파해야 하지 않는가.
6. 당시 제주도는 정부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이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또 6.25가 한몫을 했다는 것, 6.25 끝나고도 계속되었다는 것
해방 이후 1947년 미군에 따르면
제주도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년 21만 9천여 명에서 1946년 27만 6천여 명으로 2년 새 5만 6천 명 이상 늘어났다.
해방으로 해외에서 유입되던 우리 국민들로 인해 인구는 급증하였는데, 엎친데 겹친 격으로 전국적으로 대흉년과 맞물려 사회는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제주 사회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으로 1945년에는 무려 78%가 문맹자였다. 또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저 공산사회주의가 무상으로 준다는 말에만 현혹된 것이다. 김달삼의 활동으로 제주인 7만 명이 북한의 공작 세력인 남조선 노동당에 가입하여 반미사상에 동조했으니, 다. 같은 해 3.1절 기념식을 마친 3 만여 군중 중 만 7 천여 명의 좌익과 남로 단계열 군중이 미군정 통치 군대를 내세우며 시위를 했다.
4.3 사건의 발단
3.1 운동기념식에 제주도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였으나 기마 경관은 이를 무시했고,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은 기마 경관에게 돌을 던지며 경찰서까지 쫓아가게 되면서 그중 다수의 무장 인원이 경찰서로 진입, 당시 경찰서를 지키던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판단하여 발포하게 된다. 이때 군중 가운데 6명이 사망하면서 이후 남로당은 군중의 분노를 이용하여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을 파업을 주동했고, 당시 4천 명의 장교와 사병들로 군사 조직을 만들고 군사훈련을 했다. 이들은 1948년 4월 3일 무장한 채로 12개의 경찰서를 습격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하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
7. 사건의 진상과 결과
2019년 12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결정한 제주 4.3 사건 민간인 희생자 수는 14,442명이다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토벌과정에서 희생자 1,091명
무장봉기대 남조선로동당원 500여 명
제주도민 지원자 1,000여 명
(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 83.6%,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6.4%)
이는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가 벌었는가를 보여준다.
희생자 : 1,091명 (군인 162명, 경찰 289명, 우익단체 640명 등)
민간인 희생자 14,44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외
민간인 희생자 최대 25,000~30,000명으로 추정
8. 잊지 말이야 할 균형적 시각
공산세력의 세포조직과 확산은 제주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그들은 꼬리를 감추고 활약하고 있을 것이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그들을 동조하는 세력은 때를 기다리며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1948년 5.10 총선거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제주도 전체에 걸쳐 모든 마을과 읍면에 공산주의 세포가 조직되어 있었다.
각 세포조직 당, 한 명의 지도자와 선전원, 보급책 등으로 구성되었고, 규모가 큰 읍면에는 현 정부(미군정)가 무너지면 민간 정부 역할을 수행하게 될 인원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세포조직 외에도 조선인민유격대 예하에 '제주도인민유격대'(또는 '제주도인민군')도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개의 연대와 보충대대로 이루어졌을 만큼 큰 군대조직이었다. 인사장교가 임명되었고, 인원 모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4.3 폭동이 절정이었을 때, 제주도인민군 규모는 대략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갖춘 것으로 추산되었다.
무장병력 중 10퍼센트 미만이 소총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일본도와 지역에서 만든 창으로 무장했다.
당시 미군정이 파악한 보고서에는 제주도민 60,000~70,000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무지하고 못 배운 농민과 어민들로(일제가 1940년 한글사용금지를 하면서 1945해방직후 문맹율 88%),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3년 2개월), 경제 상황을 해결해 주겠다는 남로당의 제안에 쉽게 넘어갔다고 볼 수도 있다.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해서 일으킨 무장 폭동을 군경이 소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사건이다. 먼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남로당 행위, 무장봉기로 대한민국 제주도를 무법천지로 만든 흉악한 자들을 비판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 《자유》의 대가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