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갈라디아서로 돌아가 보자. 바울의 논증을 들어보자.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갈 2:20, KJV176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개역한글)
“ζῶ δὲ οὐκέτι ἐγώ, ζῇ δὲ ἐν ἐμοὶ Χριστός·
ὃ δὲ νῦν ζῶ ἐν σαρκί, ἐν πίστει ζῶ τῇ τοῦ ⸂υἱοῦ τοῦ θεοῦ⸃ τοῦ ἀγαπήσαντός με καὶ παραδόντος ἑαυτὸν ὑπὲρ ἐμοῦ.” (갈 2:20, BHSSBL)
직역
갈라디아서 2:20을 '칭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성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혹은 칭의와 성화가 함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따라 해석의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연합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성령으로 사는 삶인가? 아니면 자신이 깨닫게 된 진리를 붙들고 여전히 자신을 꺾으며 몸부림치며 달려가야 할 존재로 볼 것인가? 설교자들이 두 가지를 모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2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
σταυρόςομαι(동/직설/완료/수동/1인칭/단수)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G4957: συσταυρόω, 쉬스타우로오) : 신약성경에서 5회
1)마 27:4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에 대해 사용: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병행구 막 15:32; 요 19:32).
2) 롬 6:6,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묘사: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 옛사람" 혹은 '우리 옛 자아'가 주님과 함께 못 박혀서 "죄의 몸이 파괴되었다"라고 언급. 이렇게 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권능이 파괴된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한다.
3) 그리고 본문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본 구절은 이미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된 말씀이다(1:4, 3:1,13, 6:12,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박혀 죽으심은 <율법이 요구하는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으심이다.
롬 8장 4절처럼 구약의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심, 이루심, 완성하심이다. 이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십자가에 자신도 함께 못 박힘으로써 이제까지 자기가 지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죄의 노예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초대 교회의 신앙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으로 삶의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목숨처럼 여기며 따랐던 율법으로부터 어떻게 절교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 신학적인 논증이기도 하다.
이전에 사울로 살 때, 율법의 사람으로 살 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 그러나 그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가를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날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그 십자가를 경험한다. 그 경험은 한마디로 바울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전환(轉換)시켜 놓은 엄청난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바울 자신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을 말한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 G. Coltman).
2.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쉬네스타우로마이’
골로새서에서 사용된 '연합'(골 2:2)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쉼 비바조(συμβιβάζω)’이다. ‘쉼비바조’는 ‘~과 함께’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 ‘쉰(σύν)’에 ‘발’, ‘한 걸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시스(βάσις)’의 합성어다. 구약성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받침대’라는 단어를 전부 ‘바시스’로 번역했는데, 이는 영어 basis(기초)의 어원이다. ‘쉼비바조’는 ‘함께 걸음을 내딛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함께(쉰. 쉬네) + 스타로우마이(σταυρός, ός/>ομαι (인칭어미/ 변화-1인칭, 직설, 단수, 현재)
'십자가'는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는 위로 향한 '막대기, 곧은 기둥', 사형을 집행하는 사형틀을 말한다.
성도가 믿음으로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일시함. 여기서 우리는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었다(롬 8:4). 이는 그 십자가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지유자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3. "오직(그러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성(성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가 이미 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그 부활 안애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바울은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았고,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살고 계심으로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맛본다(롬 8:18).
4.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본 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주도권 변화 : ‘나(아담적 성품)’ 대신 ‘그리스도(하늘의 성품)’가,
(2) 삶의 이유 : ‘율법(행위)’ 대신 ‘믿음(은사)’,
(3) 과거의 ‘옛사람’ 대신 현재의 ‘새 사람’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다(롬 6:19).
비록 남은 삶이 육체 가운데 살겠지만, 그러나 그 삶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며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롬 8: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삶에 어떤 변화도 없는 자들을 의롭게 여기는 하늘의 믿음 만들기 놀이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완전히 연합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으며 우리의 자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오래된 죄악적 생활 방식이 끝났다고 말한다(롬 6:5-14).
우리는 과거와 단절되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후 5: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났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며, 우리를 날마다 그분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은 결코 죄의 핑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믿음은 율법에 기초한 종교보다 더 깊고 풍부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이시다. 또한 믿음의 완성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치 동기의 근원이 되신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진리와 순결에 대한 모든 욕망 - 우리 죄에 대한 모든 감각 - 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서 활동하시는 증거이다”(Ellen G. White, 정로의 계단, 26).
” (갈 2:20, 만나주석)
참된 복음주의는 《칭의》=구원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율법주의는 대부분 《성화》=구원으로 해석한다.
즉, 옛사람 곧 타락한 아담에서 본질적으로 타락하자 않은 상태로 복귀되는 것을 말하는가? 실존철학은 주체적인 나를 강조한다. 초인적인 삶을 강조한다.
실존철학에서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초인,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인가?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 이런 설교가 태반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면 죄송한 것인가? 그리스도를 모신 삶을 사는 삶을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
바로 성화로 해석하면 그렇다.
성화로 보면 이렇게 해석된다.
"지금도 내가 끊임없이 변화되려고 붙들고 가려고 몸부림쳐야만 하는 존재인가?"
이것이 정말로 바울은 말했던 것인가?
▪︎정체성(subjectivity)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안다.
• Identity(신원을 확인하다)
명사형은 identification(신원 확인), 줄여서 아이디(ID)라 한다. 종종 주체성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이는 외적 성질을 의미하고, 주체성은 내적 성질을 의미한다.
▪︎ 주체성(主體性)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의지가 분명함, 의식이나 줏대. 외적으로 표현되는 주도적인 내적 성질, 자신의 생각, 목적, 판단 등이 확실하고 의지가 확고함. 흔들리지 않고, 휘둘리지도 않는 견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