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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에 대한 문학적 비평과 논평

작가의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강 작품들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여러가지 논란을 떠나서 작품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비판할 수 없다면 그는 이미 우리들의 세계와 무관한 것이라 할 것이다.
비판(비난)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글을 쓸 자유, 비평할 자유
여기서 쓰고자 하는 것은 문학비평(批評)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지금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그러나 건전한 비평(批評)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글을 쓸 자유가 있고, 독자는 그것을 비평하고 비판할 자유가 있다.
사전적으로 ‘비판(批判)’이란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을 뜻한다.
이러한 비판이 없다면 전체주의에 불과하다. 작가의 글에 대한 비판이 불경죄가 되는가. 노벨상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작품이기에 그만한 비판도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도 그의 작품세계가가 다양할 수 있고 때로는 비난도 비판도 받을 수 있어야 자신을 성찰하고 잘못된 것을 고쳐 사회의 해악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도 비난이 아니라 건강한 비판력을 키워야 한다.

인간존재의  탐구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정체성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가 채식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는 영혜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소외를 다루어 간다. 뒤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영혜의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와 가정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 낸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폭력을 드러 내려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는 작가는 독자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처럼 자신의 작품을 읽고 끝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긴 여운을 남기고 싶고, 사회의 변화를 가져 오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채식주의는 개인적인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주변 인물들에게도 고통을 안겨주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아니 한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가진 인간성의 폭로와 함께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잘못 읽히면 모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섬뜩한 생각도 든다. 또 가정이 주는 축복은 눈꼽만틈도 없고, 단지 파괴된 인간성으로만 보게 만드는  거짓정보를 흘러보내는 역할을 하고, 비판능력이 없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역기능을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의 선택이 사회적 책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문학에서의 상징성과 은유의 중요성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은 단순히 육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억압과 통제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징이 너무 극단적이며 지나치게 적나라한 묘사와 표현으로, 독자가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할 때 잘못된 메시지로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
결국 글을 읽고 나서 독자의 뇌리에 무엇이 잠재의식처럼 남아 있겠는가?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책 값을 지불하고 시간을 내어 읽은 독자가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작가는 생각하며 써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균형을 읽지 말아야 한다. 채식주의자는 작가가 쓰고자 하는 메시지보다  지나치게 너무나 육체적인 부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본질을 흐려 놓았다.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다.
문학은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 의미를 확장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영혜라는 개인적인 고통에 집중함으로써 보편적인 메시지를 놓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간존재의 복잡성과 자기 모순
마지막으로 『채식주의자』는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기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맥락 간의 긴장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자들에게 영혜의 행동이 마치 최선인 것처럼,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두둔하게 만듦으로서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된다.
또 하나의 길을 열어 놓았어야 했다.
영혜가 꿈을 통해 억압된, 과거의 상처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폭력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형부 안에 있는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로만 묘사하는 것으로 이미 틀에 가두어 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도 된다는 식으로 몰아 간 것이다.
독자들은 약자인 영혜에게서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식이 되어버렸다. 이것으로 자신이 억압받은 것을 되갚아 주고 복수한 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 것이다.
이 사회가 영혜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인것처럼 오도할 여지를 만드는데 기여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나 상처가 있는 성인들이 그래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에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능이 없고 인간 안에는 그저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본성인 것처럼 만들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더 건강한 작품을 기대하며
읽고 나서 후련하고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진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영혜를 통해 대리 만족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품이 잘못된 전통의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는 글이라고는 하지만,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건강한 미래나 따뜻한 가정이 없는 것처럼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작품은 이러한 높은 수준의 고뇌와 각고의 노력으로 이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그런 글이 나왔으면 좋겠다.
상처와 응어리를 풀어내어 치유해 주는 그래서 망가진 사람들이 회복되고, 가종의 따뜻함과 미래의 희망과 행복을 노래하게 하는 그런 글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