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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 자유가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순기능과 역기능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엔 언제나 어디나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기 마련이다.
순기능(順機能)은 본래 목적하고자 하는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기능, 긍정적 기능이다.
역기능(逆機能)은 본디 목적한 것과는 반대로 작용하는 기능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는 그것의 '본래의 목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이든 처음, 초기에는 순기능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지나쳐 본래의 순기능이 가져온 유익함을 벗어나 역기능을 생산하여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는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문예부흥'이라고 한다. 문예부흥은 14∼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서유럽에로 확대되어 유럽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문예부흥은 중세 기독교가 틀 안에 가두어 둔 이성을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이성의 활동과 자유를 되찾게 된 것이다.
종교는 본래 인간의 참된 자유와 신앙으로 인본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순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역기능으로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문예부흥은 본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과 같이 자유로운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으로 출발하였으나 훗날에는 어떤 부작용을 낳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Too much is just as bad as too little). 猶를 '오히려'로 해석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부작용을 의미한다.

분명 르네상스가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들, 순기능은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도 과유불급이 나타났다. 이성의 사유의 자유는 분명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하지만, 이성의 자유가 있다고 함부로 지나치게 강조하면 역기능이 도리어 인간의 존엄성을 망치게 된다.

신앙과 이성
르네상스는 신앙세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와 변혁을 가져왔다. 중세시대는 분명 인본주의화된 종교의 틀 안에 모든 것을 가두어 두었다. 종교의 르네상스는 본래의 신본주의로 신앙에로 회귀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바리새적인 종교에로 회귀가 아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을 노래하며 자유를 누렸던 그 축복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중세시대가 만들어낸 관습화되고 형식적인 종교에서 성경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종교적 관습을 깨뜨려야 했다. 이를 위해 수성하려는 권력자들로부터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내놓음으로써  신앙개혁의 불을 댕겼다.
루터의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며, 사람의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 거짓된 교리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중세 성례 등으로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억압해 왔다. 로마가톨릭이 만든 우상화된 신앙 안에서 이성을 가두어 두었었다(이성의 아비뇽 유수). 이에 루터는 중세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성경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참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루터의 공개서한을 보자.
로마에 계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마르틴 루터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3년째 이 세대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복된 아버지 레오를 우러러보며 귀하게 생각합니다...... 로마 교황청은 공의회를 몹시 싫어하고 개혁을 두려워합니다. 한때는 하늘의 문이었던 로마 교황청은 이제 지옥의 열린 입구가 되었습니다.....
[논문 :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논문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참된 신앙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다.  이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주는  자유로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같이 중세가 가두어 둔 인본주의 신앙과 이성과 신앙의 자유를 신본주의에로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자유는 무제한적이라거나 하나님을 떠난 자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오해하는 무지한 무리들은 지나치게 해석하여 그 자유를 무제한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타락한 변형된 종교를 양산하는 사이비와 이단들을 낳게 되는데, 여기에는 사탄의 교묘한 속임이 가미된 것이다. 종교개혁에 편승한 거짓된 신앙을 만들려는 교주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것이 비단 종교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문예부흥의 물결은 일반 사상사나 철학에서도 긍정적인 순기능들이 나타났다. 일반 사상사와 철학에서도 사탄의 속임수는 여전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래서 균형을 잃고 좌초되게 만든다.

자유, 너무나 멋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유가 제한되지 않으면, 그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만해 한용운(韓龍雲)의《복종》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진리/모국)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 <님의 침묵>(회동서관,1926) -

인간의 이성은 글이나 사상을 자유롭게 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도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절제된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한다.
진리는 참 자유를 준다.
그러나 인간은 착각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가 자유라고 믿는 것이다. 분명히 알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이것도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자유,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얽매이고, 트라우마나 상처나 죄성에 매여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진리> 곧 진실이다. 진실을 몰라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참된 자유를 준다.
그 진리를 아는 것, 《진리를 알지니》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때로 대학자나 사상가들도 조차도 이런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끊임없이 진리를 통해 자기 성찰을 할 때에만,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인간의 이성의 어리석음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부작용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성이 자유라고 맘대로 한다고 자유이던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모신 사람들, 스스로 그 생각에 갇히고 말았다.
내가 대단한 철학자나 비평가는 못된다. 하지만,  한 때 철학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어떤 이의 책을 읽기 전에 철학자의 평전을 읽음으로 그를 이해하게 된다. 때로 그에게서 나온 철학이나 사상이 그가 처한 상황이나 그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사건을 이해할 때 왜 그가 그러한 사상과 사고의 체계를 가지고 책을 썼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때로 그가 쓴 글이 어디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되었는지 분별하는 계기가 된다.

니체 철학의 핵심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자.
먼저 초인 (Übermensch) 사상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가 말하는  인간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인 초인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 표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한계를 극복할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 적어도 니체만큼 학문이 뛰어나지 않다면.
그렇다고 인간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로서 초인을 추구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둘째로 영원 회귀(Ewige Wiederkunft)이다. 그는 모든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불교적이고 힌두교적인 동양사상에 그의 철학적 사유가 바탕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서양철학이 신물이 날 정도였을 것이다. 다음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격한 표현에서 그가 말하는 것은 적어도 실제로 신이 죽었다는 표현이 아니다. 그가 부정한다고 신이 죽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통적인 신앙과 사상이나 도덕체계에 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자신의 사고 안에는 서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기독교의 도덕체계, 기독교와 관련한 신이 계실만한 여지를 두지 않음으로써 신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나의(니체) 사고 안에서 만큼은 신이 없다는 말을 신은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니체가 살던 시대는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 체계가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었고, 과학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고 있었다.
그 시대적 변화와 함께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체계인 기독교(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붕괴하고 있었다. 그러한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 체계가 붕괴되는 과정에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존의 도덕 체계는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네 번째로는 힘의 의지(Wille zur Macht)이다. 니체는 생명체의 본질을 '힘에 대한 의지'로 설명하는데, 그의 철학의 중심적인 개념이다. 이는 생존과 발전을 위한 본능적 충동이라고 보았다. 그 힘의 의지는 인간 존재 안에 있는 본질적인 동력으로 주체성, 자율성, 잠재력을 통한 자아를 실현하려는 본능이다.
그는 그 시대에서 볼 때는 매우 급진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전통적인 도덕관을 비판하며,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힘의 의지》는 결국 인간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로, 사회적 제약(도덕체계, 윤리의식 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다섯 번째, 진리와 주관성으로 니체는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라기 보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니체의 사상은 존재주의와 포스트모던에 크게 영향력을 미쳤다. 현대인들에게 《주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철학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급진적 사고는 전통적인 것들을 파괴한다. 물론 진보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원동력인 동시에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과거가 물론 잘못된 것이 있다 해도 어떤 절대적인 가치에서는 그것이 있었기에 지금의 것을 있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니체의 평전을 다시 읽으면서 이전에  니체철학의 대단하게 이야기하던 것들에서 분별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프랑스의 두 번의 혁명, 사상사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의 변증법과 영국의 산업혁명, 그리고  유럽사회의 커다란 변화들이 한몫을 했다.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찰스 다아윈의 종의 기원 등과 함께.
변화되어야 할 시대적 요청들이 있다. 그렇다고 고대의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구닥다리가 아니다. 다 무너지고 없어져야 할 꼰대문화가  아니다. 지금보다 더 놀라운 것들도 많이 있다. 사상적으로 어떻게 그런 것들에서 배우고 익힐 것인가.

어떻게 '온고지신'할 것인가.
과거가 비록 우리 시대보다 낡은 것이라도 오늘과 내일로 나아가는 기초이다.
우리들이 지나치게 과거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과거애서 배울 것은 배우고,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내세에 기대과  현재적 삶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과거에 집착하지도 말고, 내세만 중시하지도 말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균형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