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기차 건널목에서
어릴 적 코 흘리게 시절부터 옆집 소꿉친구였던 경아는 쉰둥이 태어나 몸이 연약했었다.
위로 오빠가 둘, 그리고 한참 나이가 많은 언니가 있었다. 큰 오빠와는 스물다섯이나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몸은 연약했어도 부모님의 지극 정성으로 병치레는 하지 않았다.
같은 해에 태어나 늘 같이 지내는 것이 익숙해서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드디어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경아는 학교가는 날 아침이면 날 불렀다. 아니면 내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학교에 갈 때면 책가방을 들어주고,
끝나고 돌아올 때면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왕복 이십리를 함께 걸어 다녔다.
섯바탱이엔 돌바위가 버티고 서 있다. 겨우 달구지가 지날 정도이다. 바위를 깨뜨리지 않으면 길을 넓힐 수 없었다. 그래서 길이 너무 좁아 우리 마을엔 버스가 들어 오질 않았다. 또 섯바탱이를 돌아 한참을 걸어 갱고개가 있는 산을 넘어야 한다. 그 산을 넘어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산을 넘게 된 것은 커다란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였다. 저수지 윗마을은 불편해도 저수지 아래 평지말은 저수지 덕을 톡톡히 보며 농사를 짓고 있다. 저수지가 황금 들판을 약속한다. 큰 길을 한참을 걸어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마을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국민학교가 있다.
책가방을 대신 해 주고 업어주기도 하고,
함께 손잡고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찬구들이 너희는 부부냐고 놀려도 싫지가 않았다.
"그래, 우리는 부부다.
왜?
결혼할꺼다.
왜?"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를 다 마치기도 전에 대전에 아버지가 살던 대전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사체질이 아니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있었고,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불렸지만, 스무살 많은 언니가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경제력도 크게 나아져 대전에 집과 사업장을 장만했던 것이다. 어린 딸은 장남인 큰 오빠와 함께 지냈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한동안 상처도 있었다. 초등학교가 끝나갈 무렵까지는.
그녀가 주말에 종종 놀러 올 때를 기다렸다.
그녀가 약속한 날이나 방학 때가 되면 동구 밖까지 나가서 느티나무 아래서 한없이 기다리기도 했었다.
버스는 하루에 네 번 온다.
아침과 점심, 오후와 저녁.
버스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는 정류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허당인 날도 있었다.
약속도 했지만, 부모님이 거절하면 올 수없지 않은가.
나는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피부가 얼마나 고운지.
하얀 백옥생처럼 선크림을 발라놓은 듯 곱고, 숨소리조차도 예뻤다.
특히나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는 여상 여자였다.
하는 짓도 예쁘고...
미운곳이 없었다.
여름 날에는 둘이서 개울에 나가 미역도 감고, 가재와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함께 소나기를 맞기도 했다.
초둥학교 2학년때 경아의 큰 오빠가 장가를 가던 날. 그 당시에는 전통적인 혼례를 치루느라 시골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온동네 사람들이 잔치에 오고 결혼식 구경하려고 마당에 가득했다. 새언니가 연지찍고 곤지 찍고 그렇게 신랑신부 맞절을 하며 혼례를 치루는 모습을 지켜 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도 저렇게 하자고 귓속말로 속삭였었다.
나의 소꿉친구 경아에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경아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가끔 오더니 방학 때에 잠깐 오는 정도였다.
2학년 때 서울로 이사 간 친구 영우는 영등포에 살면서 방학이면 내려와 서울 소식을 전해 줄 때마다 신기했다. 종종 새로운 세상의 소식들을 귀로만 듣던 어린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해 주었다. 바깥 소식은 유일하게 라듸오 뿐이었다.
좋음, 사랑은 움직이는 것
내가 태어나 성장했던 고향은 15가구가 모여사는 아담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같은 해에 태어나 어린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지냈던 그녀와 오랜 시간들이 좋았던 것이다. 누구네 집에 뭐가 있는지를 다 알고 지낼 정도였다.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동심으로 가득찬 시간들이었고, 옆집의 경아와는 소꿉 친구부터 <좋음>이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생이 되어 머리를 까까 중처럼 밀어야 했다. 주변에 이발하는 하는 분이 없어 십리를 나가서 깎을 때도 있고, 이발사 아저씨가 아저씨가 마을에 오는 날 마을 공터에 모여서 깎는다.
이제 검은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한다. 매일 말티재가 있는 갱고개를 넘으면 저수지를 돌아서 내려가면 길게 뻗은 비포장 신작로길이 나온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예쁘지도 않던 여자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단발머리 커트를 하고, 상의는 흰 옷 브라우스에 검은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당시 2, 3학년이 되면 벌써 연애 편지도 쓰고 누구하고 사귄다는 이야기가 돈다. 3학년이 되면 직장에 들어갈 것인지,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인지 고민을 한다. 이 때가 다시 한 단계 성숙해 가는 나이다.
건널목에서
경부선 철도가 면 소재지를 가로 질러 간다. 우리 마을에서 출발하여 이십리 비포장길 끝자락엔 높은 언덕을 따라 철로가 놓여져 있고, 건널목을 지나면 면소재지가 된다.
이곳은 삶의 환경을 나누어 놓는 경계선이다. 내가 살던 고향 뒷산이 끝자락이고, 철길에 다다 때까지 펼쳐진 들판과 저멀리 큰 산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고즈넉한 전형적 시골이다.
하지만, 건널목을 넘으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래도 지역에서는 면소재지 읍내에 7일장이 서는 날이면 온 마을들에서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 떡방앗간을 찾고, 면에서 서류를 떼고, 대장간에서 농기구를 벼르거나 구입하고, 시장통에서는 온갖 것들을 펼쳐저 있고 흥정하고 거래하는 모습을 보면 시끌벅쩍하다.
아침엔 아래역에서 통근차를 타고 오는 학생들이 창문으러 손을 내밀어 손을 흔든다. 종종 버스가 건널목에 서게 되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나도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버스가 먼저 출발하려고 기름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다.
차가 출발하면 비명소리가 들릴다.
버스를 타러 나온 사람들을 모두를 태워야 출발한다. 차를 못타거나 놓치면 최소 3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걸어서 가든지.
한 시간은 족히 걸아야 한다.
그래도 걸을만한 마을까지는 많은 학생들이 걷기도 한다.
삼삼오오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봄날이 지날 때 즈음에,
버스가 건널목에 서 있다.
나는 우연히 창문 곁에 서 있는 같은 또래의 여학생을 바라보게 되었다.
기차가 지나고 차단기가 올라간다.
역무원이 통제를 하면서 버스가 출발하려고 한다.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기차의 뒷꽁무니를 바라보던 그 시절.....
기차가 지나가던 차단기가 올라가면
거기서 나의 청춘을 알리는 신호탄이 생겼다. 나의 중학교 시절을 빛나게 해줄 추억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저 기차를 타고 두 정거장을 가면 외갓집이다. 간이역에 내려서 초등학교를 지나 200미터를 걸어가면 외갓집이다.
그래서 일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외갓집이 그리워진다. 기차의 꽁무니가 산을 돌아 사자질 때까지. 1분정도 되는 시간을 우두커니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 기차 건널목은 인생의 새로운 곳이기도 하다.
거기서 새로운 소녀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거기서 몇 번을 그렇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일부러 시간에 맞춰 건널목에 설 때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점점 그녀가 어느 날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전거보다는 버스를 자주 타게 되었고, 나의 몸은 그녀의 곁으로 점점 더 다가갔다.
오랫동안 눈빛을 주고받다가 편지로,
가까워진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 놀러 가고...
그렇게 중학교 시절엔 청춘에 대해 고민했었다.
중학교를 마치면서 고등학교를 입학하기전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가면서 또 한번의 인생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때 외할아버지 덕에 일찍 공부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외할버지는 당시 국민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계셨다.
할아버지와 지내는 동안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와 공부를 계속하는 법애 대해 들었다.
이런 명강의를 듣다니.
내 인생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냥 상위권에 마물던 나는 잠시 청춘을 즐기는 것을 뒤로 미루고 대학 진학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했다.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경아와도 순옥과도 연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두 사람은 나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갈등도 없었고, 둘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아직 전화도 없고, 흑백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전부였던 그 시절이었기에.
순옥과의 이야기는 너무 많아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그녀와 중학교 시절은 나를 성숙시켜 가는 계절이었다.
그녀와의 이야기는 긴 이야기를 써야 할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은 행복 그 자체였다. 1학년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서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선생님이다. 머리도 깨우쳐 가고, 방황하던 나를 한 곳만 바라보고 달려가게 해 주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미친듯이 공부에 매달려 본 경험이 있어 여한이 없다. 그래서 나름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다녀면서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때 즈음에 내 눈에 한 학생이 들어왔다.
귀엽고 깜찍했다.
어린 녀석은 꼭 나를 선생님이라며 잘 따랐다.
어느 날 그 소녀의 할머니가 우리 둘을 불러 놓고 말했다.
"니 선생님 좋아하지,
선생님하고 꼭 결혼해라.
알았지.
할미 소원이다.
나는 그러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약속해라."
그런데 소녀는 말이 없었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싫지 않은 할머니의 강요 아닌 협박처럼, 그러나 뭔가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그런 말을 했을까?
농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자랑이 되었고, 대학에 들어간 나를 다들 부러워했었다.
그리고는 기도했단다.
우리 손녀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기도였을까?
아니면 그래도 기대해 볼만한 것이었을까?
나는 누구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아니 앞으로 또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텐데.
사랑은 움직이는 것인가?
무엇이 나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부터 하나씩 풀어 보자.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순희를 만났다.
지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그녀.
그녀 덕분에 나는 참 좋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도 나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누굴 좋아한 것일까?
일찍 입대하여 전역하고 나서 또 공부에 불을 붙였다.
그것만이 내가 나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예의였다.
복학읊하고 나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기로 직정하고 3년을 고3보다 더 열심히 대학생활을 보냈다.
정말 머리가 터져라 공부하고 대학을 마친 후 대학원에 우등으로 입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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