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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a heartache, 보니 타일러

내가 대학을 다닐 때 한창 유행했던 노래이다. 그런데 이 곡이 유행하던 유럽은 어떤 사회였을까 궁금했다.

It's A Heartache

               - Bonnie Tyler(보니 타일러) -

https://youtu.be/HZ8yrjhJqiU?si=Dc-ktyCyit8nq7DR

It's a heartache
Nothing but a heartache
Hits you when it's too late
Hits you when you're down

그저 사랑은 가슴앓이예요
마음의 통증만 남을 뿐이죠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을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깨닫게 돼죠

It's a fool's game
Nothing but a fool's game
Standing in the cold rain
Feeling like a clown

사랑은 바보들의 놀이 같은 것
바보들의 장난같을 뿐이라는 것
차가운 빗 속에 홀로 서 있는
어릿광대의 서글픔 같은 느낌이랄까

It's a heartache
Nothing but a heartache
Love him till your arms break
Then he let's you down

사랑은 그저 마음의 병과 같아
그건 마음의 고통일 뿐이라는 것
온 힘 다해 그를 사랑해 봐
결국엔 널  절망에 빠뜨릴 걸

It ain't right with love to share
When you find he doesn't care, for you
It ain't wise to need someone
As much as I depended on, you
사랑을 나누는 건 옳지 않아요
그가 널 아끼지 않는다는 걸 알 때 까진, 널 위해
그건 지혜롭지 않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건
정말 내가 의지하는 것만큼, 널.
(반복)

이런 💕 청춘들의 알콩달콩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처럼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노래이다.
https://youtu.be/2TOQnH8Cgrw?si=bQPyh-4ppyabYPU3


이 노래가 나온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이 노래가 유행이던 그 시대는 어떠했을까?
한 마디로 성자유화 물결이 유럽을 강타하고 있을 때였다.
1970년대는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세대들의 전성기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60년대 초반까지 베이비 붐 시대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피폐화된 유럽은 회복의 단계에 접어들어 부모 세대가 죽을 고생을 하며 일구어 놓은 경제적인 부요함이 축척되기 시작할  때였다.
정말 그때는 청춘들의 시대였다.
그들은 대학을 다니면서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터진 사건이 1968년은 '프랑스의 68 운동'으로 모든 기존 전통과 질서를 무너뜨렸다.
겉으로는 《프랑스 5월 혁명은 또는 프랑스의 68 운동》은 프랑스에서 샤를 드 골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 투쟁하며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 사건이다(1968년 1월 5일 ~ 1969년 3월 29일).
이 사건은 이웃 나라들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거의 모든 국가들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동구권의 일부 국가들까지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물결은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가는 거대한 쓰나미였다.
그 당시 내건 주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 부조리, 보수주의, 베트남 전쟁, 인종주의, 성차별에 대한 반대, 기성 좌익 사상에 대한 반대'였다.
사상적 배경으로는 신좌파, 문화적 자유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좌익공산주의,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 이론), 알튀세르주의
구조주의 (혹은 후기 구조주의), 실존주의
등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생긴 운동이었다.
결과는 시위대의 단기적 패배(프랑스, 미국 등)처럼 보였으나 시위대가 선거를 통한 승리(캐나다, 오스트리아 등)함으로써 시위대의 요구 사항이 장기적으로 반영되었고, "서구 및 유럽 사회의 기성 이데올로기 붕괴와 사회 자유화 조치의 장기적 시행"으로 혁명의 움직임이 캠퍼스를 휩쓸면서 한껏 축적되어 있던 근대 서방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문제로는 성차별, 인종차별, 권위주의 타파를 주창하는 젊은이들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그들 한창 열정이 넘치는 젊은 세대가 투표로 정치를 바꾸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10년이 지나면서 이성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이 하나의 사조처럼 되었을 때, 단지 젊음을 즐기려는 육체적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지를 꼬집으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쪽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한쪽에서는 그냥 순간을 즐기려는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라고 정의해야 할까?

1961년 영국 웨일스 출신의 보니 타일러는 가수로 가끔 곡을 쓰기도 한다. 성대를 수술하고 난 후 너무 빨리 노래를 시작한 탓에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1979년과 2012년 내한 공연을 위해 방문한 바 있다.

사랑은 가슴앓이와 같은 고통일 뿐이야.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름답고 행복한지는,
그 사람의 진심을 알기까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함부로 자신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거든.
그것을 깨달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어.
그래도 의심이 되거든,
그가 널 정말 사랑하는지,
힘을 다해 시험해 봐.
죽도록 진정 사랑하는지를.
그래도 늦지 않아!
네가 모르고 당할 그 고통에 비하면
그게 더 지혜롭다는 걸 알게 될꺼야.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19775&local_id=10026141

독일 68운동기 <코뮌>의 일상과 성혁명, 그리고 몸의 정치학

성혁명은 1960년대 중반이 이미 서독사회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1960년대 초까지 성에 대한 보수주의적 사고가 퇴조하고, 성의 상업화, 자유화 혹은 정치화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신했다. 이러한

www.krm.or.kr

독일 68 운동기 <코뮌>의 일상과 성혁명, 그리고 몸의 정치학
이 보고서는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독일 68 운동기 & 코뮌의 일상과 성혁명, 그리고 몸의 정치학. 2008년, 송충기(공주대학교)

성혁명은 1960년대 중반이 이미 서독사회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1960년대 초까지 성에 대한 보수주의적 사고가 퇴조하고, 성의 상업화, 자유화 혹은 정치화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신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것은 무엇보다도 피임약의 등장, 누드사진의 전파, 포르노그라피의 출연이었다. 이러한 성의 촉발은 사회 전반의 자유화 물결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신좌파, 반체제인사들, 그리고 학생운동가, 동성애 집단들이 이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을 지지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자라난 68 운동가들은 신체와 성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을 이미 어릴 적부터 시도했고, 그러한 저항에 도움을 준 것이 새로운 성에 관련된 담론과 움직임이었다. 프리섹스와 피임은 말할 것도 없고, 급속히 퍼지는 성에 관련된 지식과 성 전문가의 등장, 그리고 인기몰이를 하던 섹스 숍(예컨대, Beate Uhse) 등에서 이들은 ‘해방’의 구원자를 찾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1968년 정치적 해방 이전에 이들은 신체와 성의 해방을 경험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이히는 성혁명의 ‘도발자’ 혹은 ‘예언자’로 손꼽힌다. 그에 따르면, 섹슈얼리티의 정치화는 주로 그것의 다양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인간의 정신적 건강은 무엇보다도 섹슈얼리티의 자유로운 분출, 곧 성적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에 달려 있다. 섹슈얼리티는 결코 억압하거나 회피하거나 혹은 ‘억압으로 승화시키거나’ 해서는 안 되며,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승화시키지 않도록’ 해야 하며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논의는 1945년 이래로 서독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성담론, 곧 성이라는 인류 재생산의 기제라는 담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해방의 에토스가 되었다.
요컨대 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아니라 성의 충족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시발점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코뮌>의 성정치에서 더욱 중요한 논란거리로 부상했던 것은 바로 ‘어린이의 섹슈얼리티’(Kindliche Sexualität)였다. 코뮌운동의 주창자들은, 아도르노가 말한 바대로, 권위적 가부장제가 사회적 억압을 키운다는 점에 공감하고 그 싹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족제도를 해체해야 한다고 믿었다.
시민사회를 재생산하는 기구인 ‘전통적인’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해서 어린이들이 어릴 때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성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의 형성’을 위해서 68 운동가들은 무엇보다도 자가유아원(Kinderladen)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교육에서 탈피하고 여성의 해방에 기여할 목적으로 이러한 운동을 벌였는데, 그 주된 초점이 바로 어린이의 성적 발달에 맞추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