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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김원봉의 사상과 평가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 사람을 두고도 다른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때로 한 사람에게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인데, 개인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나 개인적인 성향 등으로 인해 어떤 이는 악인으로 묘사되고 비판을 받고, 또 어떤 이는 부풀려지고 선인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역사의 인물들(고종, 흥성대원군, 연산군....)을 보아도 그렇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리한다. 평가 역시도 각자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고, 어느 편에서 바라볼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그래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오해와 진실을 벗겨보..
민중,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이유 "민중, 시대와 역사 속에서" 와 "가난하고, 죽어라 일하는 민중이 보수적이라는 역설"이라는 책에 대해 읽기 전 나의 생각을 정리하며.....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왜 동물에 비유할까? 그만큼 인간에게도 동물적 요소가 있다는 말인가? 숙명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존재, 거기에 갇히며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기도 한다.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민중'에 속한다.민중은 과연 ‘저항’하는 ‘주체’인가?이는 갈등론, 유물론, 사회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그들이 바라는 것은 보다 안정된 사회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늩 ' 자유시민'을 꿈꾼다.민중이 저항의 주체라는 관점은 갈등론에서만 보기 때문이다.조선이라는 사회가 만든 인간은 어떤 존재인..
현대판 황제 노릇하는 시진핑의 역사관과 역사왜곡 막강한 전제군주가 된 시진핑, 구중궁궐 안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인민들에게 마치 자신을 황제로 인정받으려 몸부림친다. 그의 야욕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총체적이다. 그 가운데 하나, 특히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왜곡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이다. 중국역사교과서를 개정하면서 '대한민국을 중국의 일부였다'는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던 한반도와 관계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역사적 규정할 때 강조하는 용어가 있는데, ‘속국’ ‘종주권’ ‘종번체제’ 등이다. 이는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한마디로 객관적 역사를 주관적으로 ‘각색’하여 배우는 학생들..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 핵무장은 꼭 해야할까? 베트남 전쟁이 보여준 교훈 국제사회는 아군도 적도 없다. 언제든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냉혈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가 군사작전이라며 침공하여 형재진행형으로 전쟁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사강대국인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쉽게 먹히지 않고 있다. 지난한 전쟁은 언제, 끝이 날까?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고 위협은 하지만, 실제 사용까지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쟁 비용은 수백조가 소요되는 가장 끔찍한 사건이다. 그 피해로 인한 고통은 수십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면전의 전쟁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또 하나의 교훈 우크라아나는 1991년, 고르바쵸프가 집권하던 소련(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고 러시아로부터 독립하면서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 약 ..
중국을 믿지 마라 1979년 개혁ㆍ개방 이후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중국의 대외정책은 진화하고 있다. 먼저는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과시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실력을 축적한다)라는 조용한 확대전략이었다. 그러면서 유소작위(有所作爲:해야 할 일은 한다), 화평굴기(和平崛起 : 평화적으로 우뚝 선다)로 30년간 진화해 왔다. 하지만2015년 이후 시핀핑은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준비가 됐다고 확신했다. 금세기에 들어 이 노선에서 대외강경노선으로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1979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여 대만과 단교한 미국이 다시 대만과 국교를 수립하고 세계공장 역할을 하도록 도왔다. 그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성장했다( 껍데기만? ...무시 못하는게 강해진 부분이 있고, 한편으로는 한..
러일전쟁과 만주철도 부설권, 미국도 군침흘리다 산업혁명 이후 철도는 모든 국가의 젓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이 철도를 갖느냐는 그 나라의 산업화의 척도가 되었다. 고속도로와 함께 산업과 물류 운송 수단으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https://m.mk.co.kr/news/culture/10815385당시 하얼빈은 청나라 영토 안의 도시였지만 러시아 소유의 동청철도가 지나가는 중심지로 러시아가 경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중재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발판으로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여전히 만주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러시아와 충돌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남동부 도시인 치타에서 시작하여, 하이라얼, 치치하얼, 하얼빈, 목단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총연장 1760km의 ..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 고종 황제의 공과(功過), 그리고 멸망과정 개인에게도, 조직이나 단체, 국가에도 공 • 과가 있다. 조선말기 고종은 1637년 선조가 청의 침공으로 남한산성과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내정간섭 속에 있던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아오던 조선,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이라 칭하고, 260년 만에 청나라 황제와 대등한 주권국임을 선언하였다는 것은 매우 큰 의의가 있다. 대한제국, 국호변경의 의의 1882년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조항을 넣었다. 당시 위안스카이(원세개)는 10년 가까이 총독처럼 조선 조정 위에 군림하면서, 내정간섭과 청의 국익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며 강압적인 무력을 휘둘렀다. 그는 여러 차례 고종 폐위를 시도하였고..
아다르고 어다르다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4253982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하면서 체결된 ‘한일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하 ‘한일기본조약’)이 있습니다. 이 조약 제 2조에는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은 ‘이미 무효’라고 규정하고 있다(제2조). 이 조약은 일본어와 영어로 각각 작성되었습니다. 일본어로는 'もはや無効', 영어로는 'already null and void'라는 표기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숨긴 의도에 말려들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단순히 '무효'가 아닌 '《이미》 무효'라는 단어를 넣기를 일본이 고집했습니다. 영어로 명백함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언어인 일본어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우리 말로는 '이미'(그 때부터)이지만, 일본어..
헌법으로 보는 건국절의 의미 ● 헌법 전문 1948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 헌법전문 1987년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民主理念을 계승하고... 여기에 포함된 내용을 꼼꼼히 살펴 보자. 헌법이 제정된 1948년 시점과 1987년 개정된 시점에서 각각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헌법전문은 헌법에 담긴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을 말한다. 헌법전문에 3.1운동의 독립정신을 넣은 것은 다시는 나라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자는 것이요,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다시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날 것이라는 각오와 다짐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는 부..
이인호 교수, 대한민국의 탄생과 현대역사 1. 독립과 후유증 1-1. 한국의 독립 과정 - 우리 민족은 여러 갈래의 작은 민족이 합쳐져 이 지역에 정착하고 몇천 년을 살아온 후, 중국의 위협으로 인해 19세기 중엽에 개항기를 맞이함 - 19세기 중엽부터 근대화를 시작하던 일본에 먹힘 -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국권을 잃고 38선을 중심으로 독립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에 처함 - 대한민국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대립으로 인해 냉전의 전선이 됨 -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진전이 없어짐에 따라 관계 악화로 이어짐 1-2. 분단과 후유증 -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 정부가 소련의 사주 밑에서 작동하던 시점, 남쪽에서도 분단된 것에 대한 대응이 필요했음 - 이승만 박사는 UN의 지지를 받아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좌익 세력의 반..